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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앙총부 정문 원기69년(1984) 5월 수원교당 관산 조대진 대호법이 특별희사해 세워졌다. 원기89년(2004) 4월 26일에 현판 봉고식을 했다.② 청하원 원기19년(1934) 완성된 원불교 창립과 발전에 기여한 이공주·박창기 모자의 사가였고, 교단에 기부하면서 소모임 장소 및 응접실로 사용됐다. 특히 원기20년(1935) 여름, 도산 안창호가 전국 각지를 순회할 때 중앙총부를 방문해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 장소다.③ 구정원소태산 대종사와 은자녀(恩子女) 결의를 맺은 신영기 교도 사가(원기20년, 1935)였으나 교단에 기부
이달의 기획
원불교신문
2024.04.1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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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장진수 교무]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마친 소태산 대종사는 곧 만덕산의 산제당에 들어가서 첫 선을 났다. 그곳에 찾아온 송규, 김기천, 김광선, 오창건(이상 영광), 전삼삼·전음광 모자, 노덕송옥과 손자 김대거, 이청춘(전주), 박사시화, 이동진화, 김삼매화(이상 경성) 등 12인의 제자와 함께였다. 그리고 이듬해 시창10년(을축, 1925) 음력 3월 훈련법이 공식 제정됐다. 에서는 이를 “… 총부 구내에 전음광 씨의 사가 신축 가옥 일부를 차(借)하여 교무 송규 씨의 지도하에 남녀 선원 10여 인이
다시 읽는 불법연구회
장진수 교무
2024.04.1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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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원불교 중앙총부는 소태산 대종사가 변산에서 제법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법을 펼치기 위한 행정과 수행공동체로서의 역할이 되는 중심체를 마련하기 위해 건립됐다. 교단 초기의 역사를 돌아보면 교단 역사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 선진들이 사업과 공부를 병행하며 생활하는 가운데 공동체를 이뤄왔다는 점이다. 한 마을을 이뤄 한 가족처럼 지내며, 말 그대로 신앙 공동체이자 도덕의 공동체였다. 또한 중앙총부는 회원들이 이주해 총부를 구성하면서 확장해 왔다. 지금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중앙총부가 관리하는 총부 부속건물
이달의 기획
유원경 기자
2024.04.0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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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13년(1928) 음력 3월 26일은 새 회상 제1대 제1회 기념일에 정기총회를 겸한 날이었다. 이때 3일간 기념총회를 익산총부에서 개최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회상 창립 한도 1대를 36년으로 하고, 1대를 다시 12년씩 3회로 나눠 정한 뒤 열린 첫 기념총회다. 총회에서는 창립 제1회 12년간의 사업평가와 제2회 사업계획을 토의해 교단 발전의 기초를 확립하는 방안이 모색됐다. 총회 준비를 위해 연초부터 정산종사 등 5인이 창립 12년간의 사업보고서와 각 교도의 공부·사업성적을 사정·편성했다. 총회에서 사업보고와 역사보고가 이뤄
온라인뉴스
원불교신문
2024.03.2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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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장진수 교무] (이하 )에 ‘창립 당년의 회세’가 기록돼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회원 상황은 영광·김제·전주·부안·경성·진안 등에 남자 약 60명, 여자 약 70명 정도였고, 전무출신자는 영광·익산 등을 통해 수십 명에 이르렀다. 회관 건축 이전부터 전무출신이던 김광선, 오창건, 이동안, 이준경 등은 박원석(송학리)의 집에 임시로 머물면서 이 시기에 송학리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토지를 빌려 근근이 농사를 지었다.에 따르면, 1924년 9월에 박원석의 집에서 개최된 임시요인회는 제1
다시 읽는 불법연구회
장진수 교무
2024.03.0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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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장진수 교무] 불법연구회 2대 회장 조송광은 창립총회록 말미에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이후 5개년 동안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정기총회 및 임시총회를 개최치 못하고 평의회로 이를 대(代)하였사오니 계속 결의요항은 평의회회록에 견(見)함. 시창13년 7월 25일”이라고 직접 적었다. (1927, 이하 )을 보면 회의는 ‘정기총회, 임시총회, 평의원회, 월예회’로 규정되어 있는데, 실제로 시창(원기)13년까지는 평의원회에서 중요한 결의가 이뤄졌다.제1회 평의원회 회록(1924년 9월 10일)에 따르면 첫
다시 읽는 불법연구회
장진수 교무
2024.02.2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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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원기로는 9년. 한 해에 이뤄진 소태산 대종사의 걸음은 바빴고, 과감했고, 다정했다. 그 걸음을 좇다 보면, 우리는 아마 1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수시로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고, 걸음에 동행하며, 때론 같은 길 위에서 ‘세상을 위한 꿈’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에는 지난 1월 17일 자 〈원불교신문〉 특별기획 ‘1924, 그해 소태산 – 세상과 소통하다’에 미처 담지 못하고 남겨둔 이야기를 모았다. 당시 이리역1924년, 원기9년 당시 익산은 상당히 근대화된 도시였다. 특히 1912년 3월 6일 역무를
이달의 기획
장지해 편집국장, 민소연 기자
2024.02.1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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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6년(1921) 가을,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종사에게 “어디든지 가 보아라. 그러면 만나야 할 인연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전주는 돌아볼 것이 없다”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의 명을 받들어 길을 가던 정산종사는 진안 만덕산(萬德山) 미륵사(彌勒寺)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겨울을 지내는 동안 화주 최도화(崔道華)가 정산종사를 생불님으로 받들었다. 최도화는 정산종사가 봉래정사로 돌아가자 찾아와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 귀의하고 진안지방과 경성지방의 인재들을 귀의시켰다. 소태산 대종사는 최도화의 주선으로 오창건과 송도성을 수행인으로 하여 만덕
온라인뉴스
원불교신문
2024.01.2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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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원기로는 9년, 꼭 100년 전이다. 게다가 60간지의 첫해인 갑자년. 그해 세상에 ‘본격 등장’한 한 종교단체가 있다. 바로 원불교(당시 회명(會名) 불법연구회)다. 여기서 ‘본격 등장’이라는 말을 쓴 이유가 있다. 1924년 그해에 원불교가 내디딘 역사의 남다른 의미 때문이다. 그 내딛음에는 이전까지의 역사와는 차원이 다른 결연함 같은 게 들었다. ‘세상 속으로’ 그리고 ‘세상과 함께’. ‘그해 소태산’은 세상 속으로 한발을 크게 들이는 동시에 세상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교화’를 본격화 했다. 실제로 ‘그해
이달의 기획
대표 집필=장지해 편집국장
2024.01.1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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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9년(1924) 음력 4월, 전주 전음광의 집에서 서중안·송만경·이청춘·이춘풍·문정규·박원석·전음광 7인이 불법연구회 창립발기인이 되어 창립 준비와 총부(본관) 기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들은 회상의 총부 기지 터로 토지가 광활하고 교통이 편리해 무산자(無産者)들의 생활과 각처 회원들의 내왕에 편리한 이리(익산) 부근으로 정하기로 했다. 터전을 정한 후 6월 1일(음력 4월 29일), 이리 죽산 보광사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됐다. 각 지역 대표들과 다수의 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불법(佛法)에 정통하고 범사(凡事)에 모범이 될 만
온라인뉴스
원불교신문
2024.01.1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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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개교절 특별판으로 발행된 2117호(4월 19일 자) 에 실린 ‘소태산 대종사 발길 닿은 교당’중 초량교당과 마령교당의 내용 일부를 이정무 원로교무의 고증을 받아 다음과 같이 바로잡는다.1. 초량교당: 남부민출장소 신축기념식에 이공주, 신영기를 대동하고 참석했던 소태산 대종사는 부산역에서 기차를 놓쳤다. 이후의 상황에 대해 2117호에 실린 글에서는 ‘소태산 대종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다음날 차를 타기로 하고 김성명화에게 말했다’고 되어있다. 해당 내용 중 ‘다음날 차’는 오기이며, ‘다음 차’가 역사적으로 맞는
교화
원불교신문
2023.06.0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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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박세훈 교무] 전무출신규정 제2조에는 “전무출신이란 출가교도로서 정신과 육신을 오로지 교단에 공헌하는 자를 말한다”고 돼 있다. 한 마디로 ‘공도자(公道者)’를 본위로 한다. 전무출신이란 용어는 원불교의 개교 초기부터 사용한 ‘전무주력자(專務主力者)’, ‘전무노력자(專務努力者)’라는 용어에서 유래해 지금의 ‘전무출신’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공식적으로는 원기9년(1924) 불법연구회 창립 이후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여성 전무출신 제도는 원기14년(1929) 이청춘 선진의 의견제출을 통해 수용됐다. 교무(敎務)는
법규궁리
박세훈 교무
2023.02.2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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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은덕문화원 소태산아카데미가 9월 1일 2022 가을학기를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진행되는 강의는 박용덕 교무가 ‘소태산 불법연구회’를 주제로 온라인으로 진행한다. 전반기에 이어 〈소태산 박중빈 불법연구회〉 개정판으로 새로이 발견·보완된 역사의 장면들을 다룬다. 1강 소태산 가계와 영광으로의 이주를 시작, 신축년 영촌 물난리와 구호동 글공부, 구사행각과 증산교파 시비, 박처화의 수행, ‘여봐라 남주야’, 길룡리방언조합, 기미년 백일기도, 학명선사과 석두거사, 불법연구회 설립 상황인식으로
문화
민소연 기자
2022.09.1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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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라와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망월동 민주묘역에서 원불교 5.18 민주 영령 위령제가 끝난 후 김희용 목사에게 전화가 왔다. “교무님! 정태춘 박은옥 부부 가수의 이야기 라는 영화가 있는데 보러 가시죠!” 해서 5.18민주화운동 42주년에 목사님과 둘이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에는 생소한 노래가 소개되었다.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었다. 이 제목 하면 1990년대 발표한 정수라의 노래가 먼저 생각난다.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은 생소했다.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 시절, 가수가 발표하는 음반에는 마지막에 군가나
설교
정세완 교무
2022.09.14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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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초기 교단사를 보면 불법연구회는 창립총회 후 익산에 본부(총부)를 건설하고 각 지부를 두고 운영한다. 그 가운데 사업 활동의 필요성에 따라 교무부를 비롯한 7개 부서를 두게 된다. 이번 기획에서는 처음 총부를 건설하면서 교단은 어떤 모습이었고, 또한 교화단의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다룬다. 익산총부 건설당시의 역사와 교화단과 7부서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공동체를 이룬 집단에서의 초기 교화단대종사 당대 교화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불법연구회 익산 본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때의 불법연구회 본부
이달의 기획
유원경 기자
2020.08.1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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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20일 중앙교구 만성교당에서 원불교 성지사업회 주관으로 만석평 사적비 제막 봉고식이 진행됐다. 이날 오도철 교정원장은 "익산총부 건설 당시 엿장사이며 만석평의 밭 갈기도 눈물겨운 모습으로 새 회상 건설에 앞장섰던 선진들의 창립정신에 깊이 감사하며 그 공덕이 영원한 세월에 길이 전해지기를 염원한다"고 봉고문을 올렸다. 대종사는 원기9년 중앙총부를 건설한 후, 이 일대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답 3천여 평을 빌려 공부 비용과 총부 운영경비를 마련하도록 했다. 소작농 터였던 만석평은 선진들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문화
류현진 기자
2019.10.2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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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자 중심으로 변화된 '교무'제도전무출신은 원불교 출가교도를 통칭하는 말이다. 정신·육신·물질로 공도에 헌신하기로 서원해 공부와 사업을 하는 자로서 '공도자(公道者)'를 본위로 한다. 공식적으로는 원기9년 불법연구회 창립 이후로 추정되며, 여성전무출신제도는 원기14년 이청춘 선진의 의견 제출을 통해 수용됐다. 또한 교무는 현재 전무출신 중 교화직을 담당하는 교무 품과를 일러 부르는 호칭이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원기9년 불법연구회 최초규약의 7부서 중 주무부서인 교무부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달의 기획
유원경 기자
2019.07.25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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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양현수 교무] 소태산 대종사의 삶은 어떻게 재구성돼야 하는가? 위대한 성자의 사상과 행동이 경전을 넘어 문학으로 그려질 때 사회일반에의 너른 확산이 가능해진다. 원불교학의 지평 위에 원불교문학을 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이혜화 저술의 새 책, 〈소태산 평전〉(북바이북, 2018, 신국판 정장 516쪽)은 '원불교 교조 박중빈 일대기'라는 부제를 달았다. 책 자체도 묵직했지만, 받아든 순간 설렘과 떨림, 그리고 호기심으로 입안에 침이 마르는 느낌이었다.그간, 교조와 관련하여 교서인 〈원불교교사〉와 여러 연
은생수
양현수 교무
2018.12.05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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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이동안이 열반하자, 소태산 대종사는 한참 동안 묵념한 후 눈물을 흘렸다. 제자들의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라는 말에, 대종사는 "마음까지 상하기야 하리요마는 내 이 사람과 갈리면서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도다"라고 말씀한다. 도산 이동안 선진은 보화당을 창설해 교단 산업계의 선구자 역할을 했고, 신용과 정성을 신조로 손대는 사업마다 번성시켜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교단기초를 닦았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을 신조로 상하구별 없이 누구를 대하든 그 특성을 알아 자비롭게 지도했다. 이런 도산이 장티푸스로
대종경
이지은 교무
2018.10.2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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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소태산 대종사가 마령교당을 방문하자, 오송암(吳松庵)이 대종사를 찾아와서, 두 딸이 입교한 이후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는 뜻을 굽히지 못하겠으니, 그 장래를 책임져 달라고 한다. 이에 대종사는 "나의 법은 과거 불교와 달라서 결혼생활을 법으로 금하지는 아니하나, 그와 같이 특별한 서원아래 순결한 몸과 마음으로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어찌 범연할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장래는 부모나 스승에게보다 그들의 마음에 더 달려 있나니, 그대나 나는 정성을 다하여 지도만 하여 보자"고 말했다. 이에 오송암
대종경
이지은 교무
2018.09.06 1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