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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을 음양이라 하고 양음이라 말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음은 어두운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양은 밝은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양을 표준으로 말하면 양음이라 말할 수 있지만 양은 어두운 곳에서부터 온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즉 일반적으로 말하면 시종일관이라 말하여 시작에서부터 끝까지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더욱 철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나타난 양의 세계는 반드시 어두운 음의 세계로부터 밝아온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음양이라 하여 음을 앞세우는 것이다.비근한 예를 들더라도 사람이라는 실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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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4.02.2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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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과 양이 서로 뒤바뀌는 까닭은 무엇인가? 음이 극성하다 보면 양이 되고 양이 극성하다 보면 음으로 바뀌는 것이 자연적인 이치일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음이 극하면 양이 나오고, 양이 극하면 음이 되는 것이다(陰極生陽, 陽極生陰)'라 했다.즉 극하면 결국 쇠하고, 다시 쇠하다 보면 성해지는 이치도 또한 바꿀 수 없는 어김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다 마찬가지로 생사가 뒤 바뀌고 해와 달이 대명하며 선과 악이 뒤 섞이고 길과 흉이 복잡하게 엉키는 것이다.따라서 모든 변화는 성쇠와 흥망과 생사와 선악과 길흉의 변화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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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4.02.21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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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음과 양으로 구분 짓는 것은 일단 낮과 밤이 교차되는 것으로 가늠해 본 것이다. 낮은 밝고 밤은 어두운 것이며, 낮에는 만물이 다 생장을 하지만 밤에는 휴식을 취한다. 그래서 음양이라는 말의 근원은 언덕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말한 것이다.언덕의 밝은 면이란 일단 해가 떠서 볕이 들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가 뜨다는 뜻을 지닌 '旦'(아침 단)에 볕이 비치는 모양을 그대로 상징한 '勿'(말 물; 본디 햇빛이 비치는 모양을 그린 것인데 햇빛은 바로 보지 말라는 뜻으로 썼다)을 붙이고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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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4.02.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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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나, 땅위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모든 동물과 식물, 그리고 땅까지도 다 모양도 있고 색깔도 있다. 그렇기로 하늘은 '무'의 상징이라면 땅은 '유'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런데 왜 하늘은 파랗다거나 가물가물 하다고 색깔을 말하며 또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고 하는가. 그 까닭은 우선 물을 잘 살펴 보자. 물을 손아귀에 쥐고 보면 아무런 색깔이 없으나 약간 깊은 물을 바라보면 그 빛은 파랗다. 그리고 더 깊은 물을 보면 검다.이처럼 본디 물은 무색한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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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4.02.0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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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전체 아우르고 있는 것은 오직 하늘과 땅이다. 그래서 땅위의 만물은 모두 다 형색을 지닌 것이다. 모양으로 말하면 가로로 되어 있는 것이 있고, 세로로 커가는 것이 있다. 가로로 살아가는 것들을 흔히 일러 동물이라 하고, 세로로 자라는 것을 일러 식물이 한다.즉 개와 같은 것을 비롯한 동물들은 다 같이 좌우를 누비며 살아가기 때문에 이 모양을 그대로 본 뜬 글자가 '犬'(개 견)이요, 소나무처럼 뿌리가 뻗어 아래에서부터 위를 향해 자라는 것들은 나무라 이르기 때문에 '나무'란 땅속에 묻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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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4.01.2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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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서 출발하여 머무르지 않고 계속 분발해 닦고 나가는 것을 '분'이라 한다면 '분'을 거쳐 가슴에 파고드는 것은 의심일 것이다. 그런 뒤 다시 의심을 철저히 해 나가 하나의 의심이 둥글게 뭉치고, 그 뭉친 의심 덩어리를 풀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따라서 분발과 의심을 병행해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 '진행 사조'의 중요한 한 과정이다. 즉 사물을 대할 때마다 대하는 사물에 대하여 깨우침을 얻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충족시켜 나가야 한다는 점을 한시라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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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4.01.1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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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 머리를 풀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머리를 풀 수 없는 것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여 큰 의심으로 뭉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그런 의심이 걸어지지 않는 수가 있다.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표면만을 보고 생각하지 말고 안으로 숨겨진 진실을 깨닫기 위해 눈 위에 손을 얹어 자세히 보라고 당부한 것이며 나아가 진실은 속에 든 것이니 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일단 어째서 그런가를 잘 살피라 했다.즉 에서도 가장 말미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그런가를 묻고, 다음에 아! 그렇구나 하여 감탄하고, 일단 감탄을 했다면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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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4.01.1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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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기초하여 신앙에 발을 디딘 후에는 그 믿음의 내용(교리)을 명확히 해결코자 하는 분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분발해야 할 때에 이를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또는 아주 쉽다고 지나쳐 버리면 믿음에 기초를 둔 그 뿌리가 흔들릴 수도 있다.그래서 만약 분발해야 할 때를 놓친 나머지 법을 들을 때마다 으레하는 소리일 뿐이며 법을 별 것이 아니라는 태도로 이를 지나쳐 버린다면 이는 관문상(慣聞想 의레듣는 말이라는 생각)에 빠졌다 하여 자존자대(自尊自大)에 이르렀다고 말한다.또 법을 듣는데 아무리 들어도 도저히 알 수 없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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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4.01.0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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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忿)이란 노(怒)와는 조금 다른 감정을 말한다. 무엇을 하려는 마음을 속에서 울어 내는 것을 분이라 하고, 노는 밖으로 표출해 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내심으로 치밀어 오는 마음을 분이라 한다면 밖으로 품어 내는 노여움을 노라 한다.따라서 어떤 믿음을 지니고 그 믿음을 실천코자 하는 마음을 속으로 단단히 먹는 것은 '분'에 해당되고, 그렇지 않고 안으로 걷어 드리지 않고 어떤 일을 두고 거기에 마음이 폭발되어 흘러 나가는 것은 '노'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루지 못하고 처형을 당한 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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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2.2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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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信)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첫째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인(人)'에 말씀'언(言)'을 붙인 것이니 이 때에 '말씀'이란 내가 남에게 들려주는 말씀을 말하고 '사람'이란 내 말을 듣는 사람이라는 뜻이다.언제나 사람과 사람 사이는 말로써 소통하기 마련인데 내가 내놓은 말이 듣는 남에게 언제든지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며, 믿음이란 서로가 소통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반드시 진실된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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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2.1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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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감정의 상태를 가늠하는 말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아무래도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기쁨은 거의 다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 희비가 엇갈린다 말하는데 비하여 즐거움은 대개 자신만이 얻어지는 감정이 아니라 사물과 더불어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그 중 가장 큰 즐거움은 앎을 통해 얻어진 기쁨과 또 앎을 통해 얻어진 기쁨이 서로 교류를 통해서 즐거움으로 나타나는 것이 즐거움에서 가장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이야말로 기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기쁨과 만나 얻어지는 보다 큰 기쁨이다.그 비근한 예로써 "배우고 때로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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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2.0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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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는 말에서 가장 대표적인 말은 슬플 '애(哀)'인데 이 말의 어원은 크게 소리쳐 울 때에 울부짖는 소리가 바로 '애'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가장 슬픈 것은 뭐니뭐니 해도 부모나 형제가 죽었을 때에 일어나는 감정 그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이미 부모나 형제가 죽으면 반드시 상복을 입고 입으로는 곡을 하기 때문에 '哀'라는 글자도 또한 옷'의(衣)' (여기에서는 상복을 말함) 속에 입 '구(口)'(여기에서는 소리쳐 애통함을 나타내는 말)을 하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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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1.2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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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다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는 말은 지극히 타당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항상 가슴속에 들어 있어서 사물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표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을 두고 유념과 무념을 대조하는 것이다.그런데 때마침 가슴속에 들어 있어서 사물을 제대로 가늠해 주어야 할 마음이 외출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주인공이 밖으로 향해 달아 났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이 세상의 한 가운데 존재해 있는 것이며 그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마음인데 그것이 어느 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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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1.15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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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다는 말은 본디 몸속에 들어 있는 '기'가 품어져 나오다는 말로 '기가 뿜어져 나옴'을 뜻한 것이다. 그래서 기가 품어져 밖으로 나올려면 기를 끌어 내놓는 계기가 있어야 할 것인데 모든 악기중에서 기를 끌어내는 것은 '북'이 최고다. 따라서 '북'을 상형한 북 '고(鼓)'는 북을 땅 바닥에 놓지 않고 어떤 받침 위에 얹어 놓은 모양에 북을 단단히 덮어둔 모양을 그대로 나타내고 거기에 북을 나뭇가지로 친다는 뜻을 지닌 '지(支)'(枝; 나뭇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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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1.08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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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가 다 마음의 작용이라 하기도 하고, 삼계가 오직 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마음은 온 천하의 사물들과도 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 이 마음에서 나오는 첫째의 것이 성질이며 성능이라는 것이다.그래서성품 '성(性)'이라는 말도 마음에서 나오는 성질, 또는 성능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심(心)'에서 나오는 것 날'생(生)'이라 붙여 마음이 바탕이며 이 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그러나 똑같이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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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1.0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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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환경이라는 말을 경에서는 경계라 말한다. 즉 경계란 자기의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환경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경계라 하거나 환경이라 하거나 간에 그 말의 뜻은 거의 흡사하다.그렇다면 그 경계란 굳이 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반드시 내 몸 옆을 둘러쳐 있는 것이라 보다는 오히려 내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잔영도 뿌리 깊은 환경 중에 빼놓을 수 없는 크나 큰 환경이기 때문이다.그런 뜻에서 마음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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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0.2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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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본디 전혀 그름이 없는 것을 자성의 계(戒)라 한다고 했다. 본디 선과 악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공부 길을 잡고자 하는 자는 우선 먼저 모진 벗을 멀리 떠나고 현선한 벗을 가까이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그리고 다음으로는 "오계니 십계니 하는 등 계문을 받아 실행함에 있어서 열고 닫기를 잘 해야 한다(善知持犯開遮)"고 했다. 즉 범계를 지니되 열고 닫을 줄을 잘 알아야 한다고 신신 당부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지(善知) 즉 '잘 알라'고 말한 것은 아주 묘미가 가득한 말이다.말하자면 범계를 가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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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0.1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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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무엇이고 성(性)은 무엇이란 말인가? 본디 불교에서는 마음을 일체유심조라 하여 일체가 나타나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라 하여 마음을 가장 바탕으로 여긴다. 그리고 성이란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능을 성이라 일컬어 왔다.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유교에서는 성을 근본이라 여겨 마음이 나오는 바탕 이라는 뜻에서 심(心小)에 낳는다는 뜻을 지닌 낳을'생(生)'을 붙여 '성(性)'이라 했다. 즉 불교에서의 인식의 근본은 '심(心)'이며, 유교에서의 행동의 근본은 '성(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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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0.1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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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바탕의 본디는 어떠한 것인가? 본디에는 옳음도 그름도 없는 그런 상태가 곧 본 바탕일 뿐이다. 그런데 무명과 식이 생겨남으로부터 옳고 그른 분별이 나타나는 것이며, 이 옳고 그른 분별이 나타남으로부터 미(美)와 추(醜)의 구분이 생기고, 또한 좋고 나쁜 자기 선택의 기준이 생기기 마련이다.따라서 무명을 깨닫고 식을 과감히 없애 버리는 것이 자성의 정을 되찾는 지름길이 될 뿐이요 그러자면 반드시 분별과 시비를 다 놓아 버리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만약 분별과 시비를 마음속에 갊아 두고 사는 동안 자성의 정은 찾을 수 없다.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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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10.0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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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절대 네 가지가 없었다는 말은 다름이 아니라 첫째, 일을 하기 앞서서 그 동기에 사사로운 뜻이 없다는 말이요(毋私), 둘째, 일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기필이 없었다는 말이나 또는 고집이 없었다는 말은 천리에 맡겨 나갈 따름이지 어떤 자신의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자신에게 이로울 정도를 헤아리거나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디 사사로운 뜻이 없었기 때문에 도모하는 과정에서 기필도 없었고, 나아가 자기 고집도 없었고, 오직 자신이 바라던 이익도 없었다는 말이다.그렇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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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안웅 교도
2013.09.27 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