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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실천력의 전무출신원불교 창립의 주역인 정산 송규·주산 송도성 여래를 교단에 희사하고, 자신도 전무출신으로 무아봉공한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 1876~1951) 대희사.그는 전통 깊은 유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남의 거유인 사미헌 장복추의 문하생으로 18세부터 매년 유림강습회에 참석하고 경향간(京鄕間) 과장(科場)에 출입한 유학자였다. 17세에 준타원 이운외 대희사와 결혼해 1900년에 정산종사를, 1907년에 주산종사를 낳았다.정산종사가 남다른 뜻을 품고 구도행각을 벌일 때 이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후원을 했다. 정산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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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2.2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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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회상을 꿈꾸며미륵불시대 도래와 용화회상을 꿈꾸며 구도열정을 불태운 미륵산인. 일원대도 정법을 만나 출가 수도함을 최고로 여기며 불경에 대한 학식과 많은 법문 기록으로 초기교서 편찬에 기여한 원산 서대원(圓山 徐大圓, 1910~1945) 대봉도.그는 소태산대종사와 법연도 두터웠지만, 생질 관계로 혈연까지 겸한 지중한 인연이었다.어려서부터 지혜가 총명하고 천성이 침착하며 어른스러웠다. 9세에 한문사숙에 입학해서도 동년배에 비해 뛰어났다. 백수보통학교와 법성보통학교를 마치고 가사를 돌보던 중에 의산 조갑종 대봉도의 인도로 원기14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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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2.1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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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부건설 일익 담당새 회상 창립기에 익산총부 건설과 전주지방 교화에 일익을 담당하여 제1대 제1회 1등 유공인의 성적을 나툰 오타원 이청춘(五陀圓 李靑春,1886~1955) 대봉도.그는 전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가정환경이 어려워 '화춘'이란 기생의 이름으로 파란 많은 생활을 했다. 생 자녀가 없어 중년이 되도록 외롭게 살았으나 성격은 명랑 쾌활하고 실천력이 뛰어났다.꽃다운 시절을 다 보내고 38세 무렵에 태을교를 내왕하기도 하고, 이타원 장적조 대봉도와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과 교분을 가지면서 종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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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2.1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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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육쌍전 실천의 화신불새 회상 창업기에 보화당 등을 설립하여 교단 경제의 기반을 튼튼히 한 교단 사업계의 주역. 고매한 인품과 신성을 겸전하여 영육쌍전의 모범을 보인 도산 이동안(道山 李東安,1892~1941) 대봉도.그는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함평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인자하고 세밀하며 세정을 잘 알아주는 포용력이 있었다. 원불교와의 인연은 일산 이재철 대봉도의 인도로 원기3년 대종사를 친견하고 사은 법문을 받들고 환희심을 냈다.이후 대종사의 지도로 원기5년 '묘량수신조합'을 설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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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2.0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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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정대한 심법으로정산종사의 차녀로 태어나 어려서 부터 소태산대종사를 비롯한 선진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행운아. 청아한 인품과 공명정대한 심법으로 교화현장과 교단의 요직을 수행하며 공도의 주인이 되어 대인의 삶을 살다간 태타원 송순봉(台陀圓 宋順鳳,1934~2013) 종사.그는 근원성지인 영광에서 태어났다. 공가와 사가의 구분을 떠나 대중과 함께 살다보니 자연스레 어른들을 본받아 어려서부터 진리에 대조하는 생활을 했다. 또한 천품이 순수하고 온유하고 꾸미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올 곧은 취사를 했다. 원기29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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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1.2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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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 열정으로 뭉친 삶기관에 근무하면서도 교화열정을 놓치 않고 원광대학교에서 봉직하는 동안 8천여명을 입교 시킨 입교의 달인. 일원문화 창달에 심혈을 기울이며, 은혜의 책보내기 운동을 전개해 100만권에 이르는 책을 보내 장병들의 정신의 지평을 넓히고 군종 승인에 혁혁한 공을 세운 규산 권도원(規山 權道圓,1944~2013) 대봉도.그는 부친과 삼남매가 교역의 길을 걸은 불연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 원기49년에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원기55년 반백년기념사업회 근무를 시작으로 서울사무소, 해룡고등학교 등에서 봉직했다. 원기61년 원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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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1.2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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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교화의 효시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투신해 상해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실형을 살고 출감 후 전국을 순회하다 소태산대종사께 귀의한 독립유공자. 원기20년 일본 대판교당 교무로 봉직하며 일본교화의 효시가 된 영산 박대완(靈山 朴大完, 1885~1958)대봉도.그는 전남 여천에서 출생했다. 목포에서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13세 되던 해에 일본 교코의 도립 제2중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동경기상대에서 3년여의 수습근무를 마치고 인천관측소와 목포측후소에서 근무한 엘리트였다. 이후 측후소를 사직하고 농장지배인과 곡물상 등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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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1.1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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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 없는 순교무로교직 없는 순교무로 각지를 돌며 사무여한의 정신으로 일원대도 선양에 앞장선 개척자. 소태산대종사를 주세불로 받들며 한번 맺은 신의를 지키며 혈심혈성을 바친 이타원 장적조(二陀圓 張寂照,1878~1960)대봉도.그는 경남 통영에서 출생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구김 없이 성장하여 16세에 이웃 마을에 사는 이씨 문중으로 출가했다. 넉넉한 살림에 부족함 없이 살았으나 선천적으로 남성적인 성격을 타고난 그는 가정이란 틀 속에서 사는 것이 구차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30세 무렵에 '운명을 스스로 개척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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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1.0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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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양성과 개척불사에 헌신'사심없이 온통 바치면 이뤄진다'는 신념으로 교당과 기관을 창립해온 개척자. 교화현장에서 후진양성에 전력을 기울이고, 영모묘원 건설에 혈성을 바쳐 선진제위의 보본사업에 공덕을 나툰 균타원 신제근(均陀圓 辛濟根, 1923~2013) 종사.그는 배움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그러나 유가의 풍습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움의 길이 막혔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강열함과 부지런함은 간이학교에 갈 수 있었으나 얼마못가 폐교가 됐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읍내 보통학교에 편입해 다니게 됐다. 즐겁게 학교를 다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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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0.24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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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심으로 일관한 삶'고지식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교법에 근거한 생활 태도로 일생을 살아가며, 교단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공명에 따른 교화자. 출가 후 50여년을 임지마다 자비훈풍을 불리며 대신성과 대공심의 표준으로 일관한 현산 조지성(賢山 趙智聖, 1934~2003)대봉도.그의 부친은 교당을 찾아 두 번이나 이사할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이런 가정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원불교 정서에 젖어 들게 했다. 이런 환경은 후덕함과 인정이 넘치는 온유 자상한 성격을 소유할 수 있게 했다. 두 번째 이사는 영광 녹사리에 도양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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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0.1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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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의 어머니'소태산대종사의 열반으로 집안이 암담한 시기와 입정돈망의 시기에 창생구제의 뜻을 남 먼저 알아보고 적극적인 뒷바라지를 했던 첫 여성제자이자, 여성 전무출신1호가 된 선각자. 구간도실 건축과 방언공사 등에 열성을 다해 조력하며, 40여년을 영산원의 안살림을 담당한'영산의 어머니' 사타원 이원화(四陀圓 李願華, 1884~1964) 대봉도.그는 전남 영산포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몹시 흉년이 든 4살 무렵에 문밖에서 놀다 엿을 사준다는 사람의 등에 업혀 영광까지 가게 됐다. 그 사람은 당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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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0.1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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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위한 희생적 삶소태산대종사께서 "어느 국왕이나 재상은 물론이고 당시 조선총독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인증한 오산 박세철(五山 朴世喆,1879~1926) 대봉도.그는 간고한 가정에서 태어나 비록 학문은 익히지 못했지만 근면하고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운 환경에서 자랐다. 매사에 온유 공손하고 겸양한 성품은 언제 어디서든지 모두의 환영을 받았다. 대종사께서 대각을 이루자, 39세에 칠산 유건 대호법의 인도로 집안 아저씨격인 대종사를 찾아가 사제지의를 맺었다.원기2년 7월에 남자수위단이 조직될 때 손방단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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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10.0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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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심법으로 일관한 삶물처럼 부드럽고 담담한 성품으로 말없는 말로 성리의 소식을 나투며, 끊임없는 정진적공으로 일원의 진리에 계합한 숨은 도인. 항상 드러내지 않고 소리 없이 이뤄내는 무위의 심법으로 순수한 대인의 풍모를 지닌 수도인 염산 이수오(念山 李修悟,1929~2013) 종사.그는 '부처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을 던지며, '부처가 되려면 염불을 하면 된다'는 불타는 성불제중의 의지를 가지고 원기32년 입교와 동시에 전무출신을 서원했다.원기34년 유일학림 2기로 입학하여 수학 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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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09.2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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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기 공심의 표준인물방언공사 중에 흙을 나르는 등 고된 노동 가운데서도 소태산대종사께서 "자, 이제 시작하자"하면 제일 먼저 일어나 일을 시작한 초창기 공심의 표준인물로 공중사라면 신명을 아끼지 않은 공심가. 공금을 지극히 아끼며 대종사의 경제적 보좌 역할을 한 사산 오창건(四山 吳昌建, 1887~1953)대봉도.그는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불심이 장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특히 부친은 불심이 장해 인근 대절산에 초당을 짓고 수양을 했을 정도다. 그는 대종사의 이웃마을에 살아 잘 아는 사이였으나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자 대도회상의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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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09.1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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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출신의 사표로공부심과 사업심을 일깨워 새 시대를 향도하는 교화정책으로 새 회상이 4대 종교의 반열에 오르는 기초를 다진 교화자. 늘 스승을 가까이 모시며 구전심수로 익힌 공부를 쳇줄 삼아 수많은 공덕주와 인재를 길러내며 전무출신의 사표가 된 법타원 김이현(法陀圓 金理玄, 1930~2013)종사.그는 후진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아무리 바쁜 일터에서도 공부가 먼저였다. "일만하면 머슴살이와 같다"며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교리공부를 하게 했다. 아울러 공도자의 길로 인도하며 공부는 무아봉공을 하기 위한 것임을 일깨웠다. 또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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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09.0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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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화의 효시소태산대종사의 서울지방의 첫 제자로 서울교화의 효시이자 이타원 장적조·삼타원 최도화 대봉도와 함께 교단 3대 여걸이라 칭한 일타원 박사시화(一陀圓 朴四時華, 1867~1946)대봉도.그는 전북 남원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해 16세 되던 해, 모친의 병환이 위중하자 단지선혈을 올려 기적같이 소생하게 했다. 18세에 혼인을 했으나 16년이 지나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을 뿐 아니라 부군과 사별하고 말았다. 이후 친정 오라버니 집에 의탁하여 지냈다. 본래 바느질 솜씨가 좋아 자력이 생기자 7년 만에 독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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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08.29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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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현장에 새 바람교화일념의 열정으로 교역의 보람을 삼고 낙도생활을 한 교화자. 일생을 생사연마와 성리연마로 많은 공력을 쌓아서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임하는 곳마다 법풍을 불린 서산 이종진(誓山 李宗眞,1939~2013) 종사.그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의 세계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성장했다. 화해교당 학생회와 청년회를 다니며 자신의 고뇌를 풀어보고 싶어서 이런 공부를 전문으로 하는 교무들의 삶을 알아보기 위해 원기49년 총부강습에 20여 일간 참석하기도 했다. 이런 중에도 출가의 길에 대한 선택은 쉽지 않았지만 원기51년 법산 이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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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08.2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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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공부를 표준으로출가의 길로 나선 후 소태산대종사와 선진들의 경륜을 새기며 자유자재하는 힘을 얻기 위해 정진하고, 근검절약과 이소성대의 창립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교단 발전에 공적을 나툰 오타원 임선양(悟陀圓 林善揚, 1923~2013) 대봉도.원불교교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느 누구보다도 전무출신하기 좋은 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영산선원에 가게 됐고, 열네 살 무렵에 대종사를 친견했다. 처음 보는 순간 '아, 세상에 저런 분이 있을까' 하며 황홀경에 빠졌다.대종사께서"네가 순일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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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08.15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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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망과 학문으로 회상창업 기여한문학자, 사학자, 교육자로서 사회적 명망과 해박한 식견으로 늦은 출가에도 불구하고 교역자 훈련과 교서편찬 등에 기여하며 새 회상 창업에 공훈을 나툰 유산 유허일(柳山 柳虛一, 1882~1958) 대봉도.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타고난 총명함으로 이미 4세에 한문을 터득하고, 5세에 한시를 짓기 시작해 신동이라 소문이 났다. 13세 무렵엔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주역을 공부해 후에 '유 주역'이란 별칭을 가질 정도로 한학에 밝았다. 또한 어머니가 아프자 정성으로 시탕을 해도 약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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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08.0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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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대의로 일관한 삶쌀 한 톨, 나무 한 토막은 물론 공가의 물건을 금쪽같이 아끼며 공익정신을 일깨워준 공도의 주인. 불석신명불공(不惜身命佛供), 금욕난행불공(禁慾難行佛供), 희사만행불공(喜捨萬行佛供)으로 일관한 공부인. 법통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며 종명과 공명에 따르고, 사불범정(邪不犯正)의 대의로 취사의 모범을 보인 형타원 오종태(亨陀圓 吳宗泰, 1913~1976) 대봉도.그는 진안군 마령면 사람으로 일찍이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귀의한 부모의 연원으로 18세 되던 원기15년에 입교를 하고 총부로와 입선했다. 그러나 초창기 총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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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
2014.07.25 1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