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받는 것이다.은혜는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다. 은혜로움은 특별하지만은혜를 받는 건 특별하지 않다.눈을 뜨는 순간 은혜다. 살아 있음이 은혜이고, 눈을 뜨겠다는 의지가 은혜다. 살아 있게 만드는 숨이 은혜이고, 무너지지 않는 땅이 은혜다.함께 '살아 있음'을 나누는 모두가 은혜이고, 모두가 은혜임이 은혜다. 은혜는 찾으면 분명 있지만,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이보다 '더'라는 욕심이 은혜를 지운다. 다른 이보다 '덜' 받아도 은혜이다. 은혜는 욕심의 크기와 반비례한다. 은혜
열리고 열린다. 대종사의 말씀에 따르면, 물질은 이미 열리고 열리었다. 정신이 열리고 열린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문(門)은 닫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다. 집주인의 호불호에 따라 들어올 수 있는 것과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 열린 문으로는 무엇이든 들어온다. 이유는 열려 있기 때문이다. 주인의 호불호는 필요 없다. 호불호는 분별·주착이다. 분별·주착이 없는 열린 문의 집은 아주 커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 다 들어와야 하니 보통 커서야 되겠는가?열리고 열린 정신은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의 두렷하고 고요한
원불교는 젓가락이다.숟가락도 아니고 젓가락이다.콩자반도 집어 먹고, 청포묵도 집어 먹자.젓가락질은 배워야 할 수 있다.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냐는 유행가도 있듯,젓가락질 못한다고 죽는 건 아니다.하지만 젓가락질 잘하면 삼시세끼가 편하다.삼시세끼는 매일 온다.눈을 뜨면 찾아오는 하루처럼 거르는 법이 없다.너무 소소해서 의식하진 못하지만,몰랐다면 참으로 불편했을 일이다. 하루를 살아야 한다면 젓가락질을 배우자. 기억을 더듬어보면 원불교를 생활불교라 칭하던 때가 있었다.생활종교라는 말이 더 좋겠다.생활 속에 활용되는 종교.얼마나 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