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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조송광(慶山 曺頌廣, 1876∼1957)은 기독교 장로였다.기독교 장로로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 보고 성자적 인품에 감화를 받아 법하에 입문, 제자가 되었다.조송광(호적명 공진 工珍)은 정읍에서 태어나 18세에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고,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은거하여 의술을 익혀 이름을 사방에 떨쳤다. 의생(醫生)으로서 호를 야신(也神)이라 한 것을 보면 얼마나 명의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27세부터 기독교를 신앙한바, 김제 원평에 '구봉교회'를 설립하고 43세에 장로가 됐다. 기미년 만세운동에도 참여하고, 은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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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10.16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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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타원 양하운(十陀圓 梁夏雲) 대사모(大師母, 1890∼1973)는 소태산 대종사의 부인이다.십타원이란 법호는 대종사의 자호 가운데 하나인 십산(十山)에 연유한다.대사모는 원불교의 최고 스승인 대종사의 부인에 대한 호칭이다. 대사모는 교단의 역사가 누만년에 이른다하더라도 양하운 대사모 한 분뿐이다.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이다.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것은 반드시 숨은 것에 바탕을 한다. 후천개벽 세상의 주세불,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의 배후에는 무명성자인 양하운 대사모가 자리한다. 그는 숙세의 인연으로 대종사의 배위(配位)가 되어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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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10.0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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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타원 노덕송옥(賢陀圓 盧德頌玉, 1859∼1933)은 대산 김대거 종사의 조모이다.어린 손자를 소태산 대종사 법하에 인도하여 종법사의 중대한 역할을 하도록 한 인물이다.노덕송옥은 남원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인자하고 순진하며 매사에 거짓이 없고 정직하여 총애를 받고 자라나 16세에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로 시집을 갔다. 3남2녀를 두고 다복한 생활을 했으나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구도에 뜻을 두었다.때마침 소태산 대종사가 만덕산에 두 번째 행가를 하신다. 원기 9년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직후였다. 삼타원 최도화의 인도로 노덕송옥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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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9.2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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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의 좌우보처는 문수(文殊)보살과 보현(普賢) 보살이다. 문수보살은 대승(大乘) 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요, 보현보살은 최상의 실행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문수, 보현 보살은 석가여래불의 협시(脇侍, 좌우에서 가까이 모심) 보살로 유명하다. 좌문수(左文殊), 우보현(右普賢)이다.문수보살은 석가불이 열반한 후 인도에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하였다고 하며, 반야 지혜의 권화(權化)처럼 표현되어 왔다. 〈반야경〉을 결집, 편찬한 보살로도 알려져 있다.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된다. 보현보살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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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9.1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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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타원 전삼삼(成陀圓 田參參, 1870∼1948)은 혜산 전음광 대봉도의 모친이다. 그러니까 아타원 전팔근 종사의 조모요 전정희 국회의원의 증조모이다. 전삼삼은 아들인 전음광을 전무출신시켜 교단 창업기에 큰 역할을 하도록 한 유공인이다.전삼삼은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영대(靈臺)가 밝아 한글은 물론 웬만한 한자는 독학으로 깨쳐 고대 소설도 술술 읽었다. 21세에 한 동네 사는 전영규(全永奎)와 결혼해서 살림을 이루고 명산대찰을 찾아 득남 기도를 올려 외아들 전음광을 낳았다. 아들을 혼인시킨 해에 남편이 죽고 재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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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9.1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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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원 장적조(二陀圓 張寂照, 1878∼1960)는 초기교단 삼대여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장적조는 부산 교화의 시조요 대륙(만주 목단강) 교화를 펼쳤던 주인공이다.그는 경남 통영 사람으로 16세에 결혼하여 아들 형제를 낳고 넉넉하게 살았다. 그러나 남편과 이상이 맞지 아니할 뿐더러 선천적으로 남성적인 성격을 가진지라 한 가정에서 구속을 받아가며 사는 것이 구구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던 중 30세 가까운 어느 해에 단호히 남편과 자식들을 두고 보따리 하나를 들고 전라도로 발길을 옮겼다.처음에는 황화(荒貨) 장사 모양으로 돌아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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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9.0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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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원 박사시화(一陀圓 朴四時華, 1867∼1946)는 교단 3대 여걸(三大女傑)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교단 초창기 대중들은 박사시화와 더불어 이타원 장적조, 삼타원 최도화 세 사람에게 삼대여걸이란 칭호를 붙여 존경했다. 이들은 비록 무산(無産), 무식(無識), 노쇠하지만 전문 순교로 교화 활동에 전심전력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일원대도 정법회상에 인도했기 때문이다.일타원 대봉도는 남원 사람으로 일찍이 결혼했으나 자녀를 두지 못하고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 48세에 서울로 와서 익숙한 바느질 솜씨를 가진 지라 도정궁(都正宮) 노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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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8.2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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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내변산에서 수양하며 새 회상 공개를 준비하던 소태산 대종사가 그 뜻을 펼 수 있는 인연을 만났다. 김제 사람인 춘산 서동풍(春山 徐東風, 1868∼1925)과 추산 서중안(秋山 徐中安, 1881∼1930)형제가 대종사 법하에 귀의하게 된다. 형인 서동풍이 먼저 제자가 되었다. 원기6년 이타원 장적조의 인도로 변산 봉래정사를 찾았다. 서동풍은 김제시 금산면 사람으로 동생인 서중안의 도움으로 한약방을 운영했다.서중안(호적명 상인)은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지만 진취적 사상을 가져,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의서(醫書)를 탐독했다. 28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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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8.2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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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송적벽과 각산 김남천은 막역한 친구사이다. 증산도 도꾼들로 소태산 대종사 법하에 귀의하여 부안 변산 봉래정사에서 대종사를 시봉하고 있었다. 다정하게 지내던 이들이 하루는 심한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송적벽은 변산을 떠나게 된다. 당시 상황이 〈대종경〉 실시품 3장에 나타나 있다.대종사 봉래정사에 계실 때에 하루는 저녁 공양을 아니 드시므로 시봉하던 김남천·송적벽이 그 연유를 여쭈었더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곳에 있으매 그대들의 힘을 입음이 크거늘 그대들이 오늘 밤에는 싸움을 하고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떠나갈 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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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8.1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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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부안 변산 제법시절, 측근에서 시봉의 도리를 다한 송적벽과 김남천은 친구였다. 이 두사람은 원래 증산 강일순의 제자들이었다.하산 송적벽(夏山 宋赤壁, 1874∼1939)은 충청도 사람으로 인정 많고 무슨 일에 나서길 잘하며, 흥분을 잘하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 얼굴은 길쭉하고 검붉은 편이었다. 증산 선생을 믿고 따르게 되면서 김제군 원평으로 옮겨와 엿방의 물주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증산 천사를 받드는 점에 있어서는 맹목적이리만치 충직한 신앙을 가졌다.송적벽이 대종사의 제자가 된 것은 정산 송규 종사와의 인연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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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8.0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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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 미륵사 화주 최도화는 자신이 존경하는 정산이 매양 단벌로 지내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고 비단 솜옷을 정성들여 지어 가지고 절을 찾았다가 정산이 미륵사를 떠나고 없음을 알고 애통해 하며, 물어물어 부안 변산 봉래정사를 찾았다.최도화는 정산의 안내로 큰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다. 정산종사를 연원으로 입교하여 '도화(道華)'라는 법명을 받고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삼타원 대호법의 신성과 정성은 대단했다. 대종사가 심산궁곡에서 악의악식(惡依惡食)을 하는 것이 항상 가슴에 맺히고 유감이 되어, 전주나 남원 등지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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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7.2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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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삼대여걸 가운데 한 사람인 삼타원 최도화(三陀圓 崔道華, 1883∼1954) 대호법의 입문은 정산종사와의 인연으로 비롯된다. 최도화와 정산 송규의 만남은 만덕산 미륵사에서 이뤄진다.부안 변산에 봉래정사를 지은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종사를 월명암에서 내려와 당신곁에 있도록 했다. 백학명 선사에게 대종사와 정산종사가 외삼촌과 생질 관계가 아니라 실은 사제지간임을 밝히고 그간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해 미안함을 표했다. 이에 학명선사는 형 정산 대신 아우 주산 송도성을 당신 제자로 주라고 요구했으나, 대종사는 허락지 않았다.대종사,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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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7.1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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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는 효심이 장하였다. 유학자로서 백행의 근본인 효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구산은 참으로 착한 아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소와 송성흠(韶窩 宋性欽)이 나이 41세에 상처를 하고도 독자(獨子)인 아들을 위해 재취(再娶)를 하지 않고 혼자 아들을 키웠고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구산이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송성흠은 정이 많아 굶주린 사람을 보면 집에 데리고 와서 밥을 먹였으며,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가 부엌에 쪼그리고 밥 먹던 일이 마음에 걸려 자부와 손부를 꼭 방에서 먹도록 배려, 남녀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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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7.1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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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인 정산 송규 종사와 일곱 살 터울인 아우 주산 송도성(主山 宋道性) 종사, 그의 입문과 출가는 원불교 교단사에 또 하나의 큰 경사였다. 13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형이 있는 영광으로 온 아우 도성. 차멀미가 심해서 이사 오는 과정에 고생이 많았었다. 영광군 군서면 학정리 신촌마을에 살면서 아버지 구산 송벽조를 따라 30리길을 걸어서 백수 길룡리 영광지부로 예회를 다녔던 송도성이다.부친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를 뵈온 도열(道悅, 호적명)이 제자가 되기를 발원하자, 대종사가 "네가 어찌 그런 마음이 났느냐"고 묻자, 어린 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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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7.0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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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산 이춘풍(薰山 李春風, 1876∼1930)은 정산종사의 외사촌 형이다. 그러니까 정산종사의 어머니인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 대희사의 친정 조카이다. 호적명은 지영(之永)으로 유학자였다. 경북 금릉군 구성면 하원리에서 태어났다. 명문거족인 연안 이씨(延安 李氏)로 당시 이름있는 학자인 입암 이돈영(立巖 李墩永) 선생이 재종형(再從兄)이다.선산군 옥성면 신포리 경타원 정삼리화(敬陀圓 鄭三离火)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 여덟을 두었다. 교단적으로 유명한 항타원 이경순(恒陀圓 李敬順) 종사가 일곱째 딸이다. 교산 이성택 교무는 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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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6.2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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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는 법인기도를 마친 후 원기4년 10월 새 회상 공개를 위한 교법을 완정하기 위해 부안 내변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사산 오창건, 오산 박세철 두 제자를 데리고 9인 단원이 기도 때에 사용한 시계 아홉 개를 가지고 월명암으로 향했다. 당시 언답을 막느라 현금을 다 투자한 터라 비상금 대신 시계를 챙긴 것이다.대종사, 나머지 단원과 영광의 신자들을 뒤로한 채 월명암에 당도하니, 정산 송규는 환희 용약하는 마음으로 스승을 만났고, 백학명 주지 또한 반가이 영접했다. 백학명의 주선으로 가져온 시계와 이만갑의 희사금으로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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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6.1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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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공사가 끝나갈 무렵, 사산 오창건을 데리고 부안 변산 월명암을 잠시 다녀온 소태산 대종사는 법인성사를 마친 후 수제자 정산 송규를 불러 새 회상 창립을 위한 준비 계획을 설명하고 "먼저 월명암에 들어가 백학명(白鶴鳴) 선사의 상좌로 있으면서 나를 기다리라. 여러 방면으로 연구는 하되 불경(佛經)은 보지말라"고 당부한다.정산종사, 월명암을 찾아가니 학명선사가 크게 반기며, 몇가지 성리 문답을 해보고 나서 "네 눈이 참으로 밝다"며 정산종사에게 '명안(明眼)'이라는 불명을 주었다. 송규는 학명선사의 상좌로서 시봉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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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6.1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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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의 선비로서 정든 고향 성주를 떠나 영광으로 가족을 솔거하여 이사를 온 제자 구산 송벽조에게 소태산 대종사는 이렇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대종경 선외록〉 사제제우장(師弟際遇章) 15에 나온다.대종사 송벽조에게 말씀하시었다. "그대가 어린 아들의 말을 듣고 유가(儒家)의 규모(規模)를 벗어나서 친척 친우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정든 고향을 떠나 나의 처소에 이사하여 온 것은 그 신심도 장하려니와 이것은 숙세의 깊은 인연이요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이사를 오면서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일시에 날리고 자신은 물론 가족 모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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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6.0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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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전라도로 이사올 것을 권유받은 송벽조는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과 상의를 한다. 어릴적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손자(정산종사)의 장성하는 모습을 익히 지켜본 조부는 칠십이 넘은 고령에도 기꺼이 아들(송벽조)의 제의를 허락한다.사는 집이고 전답을 싼 가격에 처분한 송벽조는 먼저 영광으로 갔다. 음력 9월에 이사를 올것이니, 살 집과 전답을 구해 달라고 대종사 측근에게 부탁을 하고 성주로 돌아왔다. 음력 9월이 되어 가족을 솔거하고 전라도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도보로 걷기도 하면서 정든 고향을 떠나왔다.함께 나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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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5.2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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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개벽의 주세성자인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는 팔인제자와 함께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드는 방언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쳐서 새 회상 창업의 경제적 기초를 세웠다. 이어서 한 일은 새 회상 창립의 정신적 기초를 굳건히 다지는 기도운동이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일제의 압정에서 조선의 독립을 요청하는 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기미년 만세 운동 때 대종사는 "개벽을 재촉하는 상두 소리니 바쁘다 어서 방언 마치고 기도 드리자"고 아홉제자들에게 말씀했다. 〈정산종사법어〉 국운편 3장.앞으로 세상은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되는 반면에 물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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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교무
2015.05.22 1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