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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의 성립 시기는 대략 서기 150~200년경으로 본다. 그래서 대승경전의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으로 추측한다. 중국으로 들어와 401년 구마라집의 번역 이후로 여러 차례 한역(漢譯)됐지만, 대중에게는 구마라집의 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읽히는 주석서는 조선 초 함허(涵虛) 득통(得通)스님이 정리한 다. 여기에서는 1~14장을 상권, 15~32장을 하권으로 분류하고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의 14장 초반 혹은 13장까지가 최초의 원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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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3.01.0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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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32상 혹은 외형(身相)으로 여래를 볼 수 있냐는 내용은 5장, 13장, 27장에 나온다. 32상은 부처님이나 전륜성왕이 가졌다고 하는 32가지 특징적인 외모다. 32상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여래의 몸이 가지고 있는 남다른 특징’이다. 발바닥이 편평하다 등 32가지인데, 우리가 절에서 보는 불상에 이 32상이 담겨있을 것이다.이에 대해 은 조금 다르게 말한다. ‘32상 혹은 색신으로는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 외모로 여래를 찾으려는 것은 헛된 것임을 반복해 말한다. 이것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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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2.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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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이때 수보리가 법문을 듣고 그 뜻과 나아갈 바를 깊이 깨달아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말하였다.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심오한 경전을 설해주셨습니다. 저는 예로부터 수행을 하여 혜안을 얻었지만, 이와 같은 법문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후략)…(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14장 중)수보리는 왜 눈물을 흘렸을까? 수보리의 눈물은 깨달음을 얻은 기쁨의 눈물이고 고통의 바다를 헤매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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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2.2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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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에서 부처님은 말한다. “나는 법을 설한 바가 없다.” 법을 설했으면서 왜 설한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일까? 설법은 언어라는 상을 통해서 불완전하게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생의 보배라고 할 수 있는 부처님의 법문도 잠시 인연에 따른 이름이 있을 뿐이고, 연이 다하면 없어지는 임시적인 도구다. 법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가장 작은 것으로 생각하는 티끌(微塵)도 그러하고, 가장 큰 것으로 생각하는 세계도 그러하다. 그저 이름일 뿐이다.삼천대천세계에 티끌이 가득 차 있다. 그 수가 한량없다. 세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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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2.1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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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수보리야 부처가 말한 반야바라밀이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13장 중)의 제목을 설명한 부처님은 수보리와 문답을 통해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또 이어서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없다’고 말한다. 조금 전에 당신이 이야기한 법문의 제목을 ‘금강반야바라밀’이라 이름을 말하고 다시 반대되는 말을 하니 후래의 제자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굳이 설명하자면 지금까지 설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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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2.0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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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법문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러한 이름으로 받들어 실천하라(佛告須菩提 是經名爲 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13장 중에서)은 기원후 500년경부터 다른 논서들에 ‘와즈라체디카 쁘라즈나빠라미따 슈뜨라(Vajracchedikā prajñāpāmitā sūtra)’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여러 차례 한역되었는데 동북아에 가장 널리 유포된 구마라집의 번역(402년)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신역(新譯)이라고 불리는 현장의 번역(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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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1.2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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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세존이시여 이 경은 무엇이라 이름하는 것이 마땅하오며, 우리들은 어떻게 받들어 가지오리까?(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13장에서 수보리는 세존에게 지금까지 설한 법문의 이름을 물어본다. 책의 절반 정도가 지난 후 책의 제목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이다. 요즘 나오는 책이나 경전의 주석서 등에서 글의 서두에 집필 의도나 경전의 이름을 해석하는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하지만, 불교 경전이 구성된 과정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글로 정리된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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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1.2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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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12장에서는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8장의 내용과 11~12장의 내용은 변주·반복되고 있다. 8장 후반부에는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일체 모든 부처와 부처의 아뇩다라샴먁삼보리의 법이 다 이 경전에서 나왔다. 수보리야 소위 불법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고 했다. 12장에서는 “이 경전을 설하다가 사구게에 이르면 온 세계의 천인·아수라들이 모두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공양할 것이다. 하물며 이 경전 전부를 수지독송하는 사람은 (말할 필요가 있을까).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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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1.1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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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11장과 12장은 법보시와 경전의 중요성과 가치를 말한다. 세상을 가득 채울 정도의 무한한 양의 보물을 사용하는 보시보다 을 전해주는 공덕이 더 크다고 역설한다.그런데 11장의 내용은 8장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다른 점을 굳이 꼽자면, 8장에서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 보시를 한다는 것이고, 11장에서는 항하(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은 숫자의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삼천대천세계가 있으며 이 모든 세계를 가득 채울 정도의 칠보로 보시를 한다는 것이다.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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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1.0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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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수보리야. 이런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낸다. 마땅히 색에 주한 마음을 내지 말고, 성·향·미·촉·법에 주한 마음을 내지 말아라.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10장)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은 우리 ‘무시선법’에서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인용되었다. 주한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것은 무슨 말씀일까? 10장의 흐름을 따라서 읽어보자.먼저 여래는 ‘연등불에게 받은 법이 없다’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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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0.2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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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부처님은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느냐”고 묻는다. 수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므로 장엄이라고 한다”는 아리송한 답을 이어간다. 장엄은 꾸민다는 말이다. 불토를 장엄한다고 하면 불단, 교당, 도량을 깨끗이 청소하고 잘 가꾸는 것이 우선 떠오른다. 그런데 어떻게 가꾸는 것이 잘 가꾸는 것일까?혜능은 “불토는 이미 청정하여 형상도 형태도 없는데 어떤 물건으로 장엄할 수 있겠느냐?(佛土淸淨, 無相無形, 何物 而能莊嚴耶) 다만 정혜의 보물로 (장엄)하는 것을 장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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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0.1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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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연등불의 처소에서 얻은 법이 있느냐?”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여섯 부처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름은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불, 가섭불(곧 연등불)이다. 연등불은 석가모니불 바로 전 세상의 과거불을 말하고, 현재불은 석가모니불, 미래불은 미륵불이라고 한다. 과거세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선혜동자라 불렸다. 선혜동자는 연등불이 오시는 길이 질어서 걷기 힘든 것을 보고 자신이 입은 사슴 가죽을 땅에 깔았고, 가죽이 모자란 부분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다시 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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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10.1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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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삼매(無爭三昧)를 얻어 사람들 가운데 제일이라. 곧 으뜸으로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장 중)아라한의 약칭은 나한(羅漢)이다. 아라한은 본래 부처를 가리키는 명호다. 불교 초기에는 아라한이 부처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고, 그 차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또한 제자들(聲聞乘)이 도달하는 최고의 계위, 이상적인 모습으로 칭하는 용어였다. 이후 대승불교에서 부처와 아라한을 구별하여, 아라한은 부처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소승의 성자로 격하시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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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09.3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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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아나함은 ‘오지 않는다’라고 이름하지만, 실로 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아나함이라고 이름합니다(阿那含名為不來,而實無不來,是故名阿那含).”( 9장 중)아나함은 성문사과의 세 번째 지위이다. 혜능은 “아나함은 불환(不還) 혹은 출욕(出欲)이라고 번역한다. 욕심을 벗어난다(出欲)는 것은, 밖으로 욕심나는 경계를 보지 않고 안으로 일으킬 욕심이 없어서, 반드시 욕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었기에 이를 일러 ‘다시 오지 않는다(不來)’고 한다. 그러나 실로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도 없는 것을 일러 ‘다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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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09.2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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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한번 왕래함을 말함이나, 실제로는 왕래함이 없으므로 사다함이라고 이름합니다(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9장 중)‘사다함’은 성문사과의 두 번째 지위다. 이 발생할 때, 대중에게 해탈은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고, 이런 인식은 중국불교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육조 혜능은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하지만, 자신의 독자적인 이해를 더해 대승의 사과(四果)를 설명했다.혜능의 설명을 따르면 사다함은 삼계(三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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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09.1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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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의 가르침은 상을 없애고, 상에 주한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다. 상을 없앤다는 것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이 본래 부처라면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단계가 필요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상을 없애는 것에 그친다면 성문사과의 계위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을 없애고 동시에 상에 주한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면서도, 그 사이에는 ‘마음을 내는 수준’에 차이가 있다.성문사과의 첫 단계는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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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09.0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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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느냐. 수다원 스스로 수다원 과(果)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 답하기를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하략)”(, 9장) 9장에는 소승의 사과(四果) 혹은 성문사과(聲聞四果)가 언급된다. 성문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뜻이다. 이는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한 사람들을 두루 칭하는 용어가 된다. 대승불교 이전의 소승불교 혹은 남방불교에서는 수도인의 과위를 4계단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이다. 혹은 예류(預流)·일래(一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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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08.2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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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불교에서는 반야를 제불의 어머니(諸佛之母)라고 말한다. 이 반야를 담고 있는 도 역시 제불의 어머니다. 에 전하고자 하는 반야가 성불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은 반야와 함께 반야를 얻기 위한 방편을 담고 있는 듯하다. 8장에서 부처님은 “을 전하는 공덕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 보시의 공덕보다 더 크다”고 하고, 그 이유를 스스로 설명한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가 성취한 아뇩다라샴먁삼보리는 모두 이 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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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08.19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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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 가운데 사구게 등을 받아 가져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준다면, 그 복덕은 앞의 칠보 보시보다 더 클 것이다(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勝彼)”(, 8장 중)부처님의 지혜는 보통 사람의 견해로는 상상할 수도 없어서,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범부들은 오히려 여우같은 의심을 내기도 한다. 사구게를 전하는 법보시 공덕에 대한 말씀도 그러하다. 보통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말씀이다. ‘사구게를 전하는 것’ 또는 ‘가르침을 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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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08.1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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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에서 사구게(四句偈)를 전하는 공덕이 여러번 반복된다. 사구게를 수지독송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공덕이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칠보보시 혹은 몸과 마음을 바친 보시보다도 공덕이 크다는 것이다. 단순히 사구게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칠보보시보다 더 큰 공덕이 될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산스끄리뜨어 ‘catuṣpādikām gāthām’은 ‘네 구절로 된 게송’을 뜻한다. 이를 구마라집은 사구게, 현장은 사구가타(四句伽他)라고 한역하였다. 에서 게송은 28장과 32장에 2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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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교무
2022.07.28 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