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래구곡.
소태산의 변산 입산의 의미

'어떤 이별도 아름다운 건 없다' 했던가.
그 겨울, 영산 선진나루 바람찬 언덕배기에서 눈물로 배웅하는 제자들을 뒤에 두고 고향을 떠나는 소태산의 이별이 처연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계속된 일경의 감시와 경찰서 연행으로 고초를 겪고, 방언공사 등으로 분망하고 복잡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가운데 지안일 갈대숲을 내쳐 걷는 동안 영산의 산 그림자는 점점 멀어져 갔을 것이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소태산의 변산 입산을 박윤철 교무(원광대)는 "원불교 역사상 가장 커다란 사건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영산을 주 무대로 전개했던 소태산의 교화방식(저축조합, 간척지 개척, 기도결사운동 등)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곧 소태산의 활동근거지가 '영산에서 변산을 거쳐 익산으로 이어지는 제 1단계 수순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밖으로는 수양처를 찾아 변산을 택했지만, 소태산의 변산 입산은 실로 새로운 종교운동 전개를 위한 준비작업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는 대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새 시대의 보편종교로 나아가려는 포부와 경륜을 가진 소태산은 변산을 전진기지 삼아 새회상의 교리와 제도의 밑그림을 그리며 교강을 선포하고, 교서 초안과 창립의 인연들을 결속하는 등 다가오는 세상의 고해바다를 향해 던질 거대한 그물을 엮어나간다.

변산의 돌과 석두거사

그런데 변산에 은거하는 동안 소태산은 자신을 '석두거사(石頭居士)'라 칭하고, 거처할 초당을 '석두암(石頭庵)'이라 이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성리법문의 절창으로 회자되는 〈대종경〉 성리품 11장을 비롯하여 변산의 법문 속에는 종종 '돌'(石)이 등장한다.

소태산이 이렇게 당신의 아호와 당호에 '돌 석' 자를 사용하고 돌을 비유로 법을 설하신 뜻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변산에 와서야 비로소 풀린다.
내변산은 산 전체가 바위와 돌로 되어있다. 계곡은 물론 전답이며 도로까지도 이곳 골짜기는 온통 뒹구는 돌멩이 천지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저마다 눕거나 앉고, 선 채로 물소리를 듣는 봉래구곡이며, 실상동 석두암 초당 터 역시 옆으로는 커다란 거북바위가 있고, 바로 앞에는 우뚝 선 인장바위가 한눈에 조망된다.
스승이 떠나시고, 초당의 자취 흔적 없는 오늘 날에도 바위들은 여전히 묵묵하게 그 터를 지키고 있다.

'봉래정사에 계셨으므로 봉래구곡의 돌이 소재가 되었을 뿐'이라고, 그래서 변산에 널려있는 일상의 돌들이 소태산의 호칭과 진리적 메타포로 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성자들의 비유는 언제나 중생의 현재적 삶과 밀착되어있고 가장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길어 올리기 때문이다.
소태산의 아호 '석두거사'의 '석두'는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석두거사'라는 호칭은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석두(石頭)를 돌 머리, 즉 돌중에 으뜸 돌(큰 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이는 범인으로써는 가히 측량할 수 없는 '큰 사람'을 의미하는 상징이 된다.
'석두'가 내포하고 있는 이 같은 야누스적인 상징을 통해서 소태산의 면모를 다시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종경〉성리품 11장과 19장의 법문들은 '돌'이 곧 소태산 자신이며, 당신의 깨달음의 메타포요 경륜의 상징임을 말해주고 있다.

성리소식의 일 번지

그래서일까. 성지를 에워 싼 바위들을 보고 있으면 당시 석두거사의 모습과 삶이 겹쳐지곤 한다.
장중하면서도 묵연히 보고 들으며 본래 천진으로 거기 그렇게 있을 뿐인 바위, 이는 곧 진리를 깨친 자의 '치연작용이나 정체여여'한 모습이요 삶이 아닌가.

바위(돌)는 바로 철저한 진공묘유의 경지를 이르는 메타포요 그 경지를 체득한 소태산 자신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태산은 변산에서 제자들에게 견성성불(見性成佛)과 관심입정(觀心入定), 그리고 보임함축(保任含蓄)의 심오한 성리의 세계를 주로 설하였다. 최초의 교서 〈수양연구요론〉을 이곳에서 초안하였으니 제법성지는 또한 성리소식의 제1번지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성리품 9장에서 "종교의 문에 성리를 밝힌 바가 없으면 이는 원만한 도가 아니니 성리는 모든 법의 조종이 되고 모든 이치의 바탕이 되는 까닭"이라고 말씀하셨다.

소태산은 새회상의 교법이 어디에 근원해야 하는 가를 정확히 간파하고 성리의 세계에 깊이 천착하며 변산 시대 5년을 법의 그물을 짜며 바위처럼 그렇게 묵묵히 석두거사로 보낸 것이다.

<변산 원광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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