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저를 살렸겠습니까?"

▲ 예술통합치료 프로그램을 선 보이며 시를 읊었
▲ 가슴 가득 희망뿐인 이주실 배우.
투투 드레스와 망사스타킹을 신고 춤을 추는 할머니. 1100명의 관객 앞에서 자신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이주실 배우(68). 그는 27일 대장정의 막을 내리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이하 빌리)의 할머니 역으로 출연중이다. 반백의 긴 머리카락을 촬랑 거리는 모습은 그가 이 공연을 얼마나 즐겁고 기쁘게 임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했다.

'배우 이주실'. 그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하나있다. 바로 유방암 말기 환자였다는 사실이다. 의사들은 길어야 1년밖에 살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런 그가 지금 뮤지컬 공연을 하고 또 다른 오디션을 준비 중이다.

15일, LG아트센터 분장실에서 열심히 할머니 편지를 쓰고 있는 그를 만났다. 그에게 많은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었던 과정을 들어봤다.

'오늘의 일기'가 곧 유서

그는 빌리의 공연 뒷이야기와 배우들의 생각들을 '막장일기'를 통해 기록하고 있다. 공연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할머니의 일기'로 불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일기를 그는 '유서'라고 표현했다.
"막장일기의 할머니 편지를 쓰게 된 것은 한국의 1대 빌리들과 1대 할머니가 교감했던 것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죠. 이건 역사의 기록이자 내 유서와 다름없어요."

그에게 유서란 어떤 의미이기에 일상의 언어로 쓰게 된 것일까. "일반 사람들은 유서라고 하면 '뜨끔'해 하며 놀라요. 죽음은 우리와 너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발단단계의 한 과정이죠. 전 '유서'를 잘 살기위한 매일의 정리라고 봐요. 일기를 쓰면서 오늘을 되돌아 보고 마음을 정화시키면서 자기 성찰을 하게 돼요.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목표이기도 하죠. 이런 마음으로 살다보니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어졌어요." 그는 유서에 대한 말을 계속했다.

"마지막 내가 쓰는 글이고 말이다 생각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져요.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진지해 지죠. 또 허투루 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되죠. 그래서 전 일기를 공들여 쓰게 됩니다."

그가 의사에게 '1년밖에 살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도 유서를 썼다. 당시의 유서를 줄줄 읊어주던 그. "두 딸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물려줄 물질은 없다. 엄마가 어떻게 살아 왔는가 본 것 그 자체가 유산이다. 그리고 내가 눈을 감으면 한 쪽에 책상 펴 놓고 부의금을 받지 말아라. 또 내 죽음을 소문내서 사람들을 그곳까지 오게 하지도 말아라. 내 죽은 육신을 어디에 놓아두고 부담 느끼지도 말고 화장해서 공기 속에 뿌려 주라. 보내는 것이 섭섭하거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실컷 들려주고 보내다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생사(生死)의 강을 건넌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그 지경을 당해 보면 마음이 깨끗해지면서 달관자가 돼요. 그런 의미에서 큰 병을 앓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일부러 선택할 수 는 없지만 그 병을 수용해서 이렇게 새 사람으로 활동할 수 있게 도와준 모든 분께 너무나 감사할 뿐이죠." 그의 말을 들으며 욕심과 애착을 놓는 일, 내 앞에 놓여진 경계를 잘 수용하는 일, 원망할 일을 감사로 돌릴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저는요 사람들이 유산을 남기는 유서보다는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주는 그런 내용이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어떻게 보면 무거운 주제의 인터뷰 임에도 그는 사뭇 밝고 경쾌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그 모습이 희망을 꿈꾸는 소녀의 눈빛이다.

영산성지와 인연

"영산성지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있어요. 거기에서 제가 살아난 것이죠." 가슴 저 아래서 올라온 감동의 목소리로 그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그는 기적같이 암을 완치할 수 있었던 것은 영산성지에서의 생활이었다고 밝혔다.

"누가 저를 살렸겠습니까? 바로 원불교를 창시한 대종사님과 그곳의 주민들, 영산성지고등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이었죠."
당시의 생활을 또렷이 기억하는 그는 눈시울을 적시며 한참 가슴을 쓸어 내렸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당시 주민들은 그를 서울댁이라 불렀다. "서울댁, 이 민들레를 먹어봐. 한결 나아질텐게."

한 교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녹즙을 갈아 기숙사 방문 앞에 놓아두곤 했다. "그렇게 성지의 인연들이 절 살려서 내 보내준 것입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예요.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감사의 눈물이 절로 솟구칩니다."

그가 영산성지고에서 생활하게 된 계기는 인생의 마지막 작업이라 생각하고 시작한 1인 연극이었다. 전국 소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하던 중 영광 공연에서 당시 영산성지고등학교 황명신 교장을 만난 것이다. 황 교장은 연극을 마친 그에게 다가가 "우리 아이들에게 특강 한번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황 교장선생님의 청으로 아이들에게 특강을 하는데, 다리를 떠는 아이, 머리에 온통 무지개 빛 염색을 한 아이 등 한 순간도 가만있지 못하는 아이들이 제 마음을 붙든 것이죠. 학생과 교사, 나아가 부모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소통의 다리가 되어야겠다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일주일 만에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영산성지고로 내려갔죠."

그는 성지고에서 연극수업을 하며 춤과 역할극을 통해 닫혔던 학생들의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서서히 행복바이러스가 온 몸을 감쌌다. 그 순간이 바로 치유의 순간이기도 했을 법하다.
"저는 학생들과 행복릴레이를 하는 것 같았어요. 퉁퉁 부은 몸으로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나면 가쁜 해 지면서 지그재그로 행복감이 전달되는 걸 느꼈거든요."

그는 영산에서의 학생들과 모든 인연, 청정한 환경이 유방암 치유의 매개체였다고.

잘 노는 것이 건강한 삶

이번 빌리 뮤지컬에서도 청소년 출연자가 23명이나 된다. 1년 여 이상 이들과 함께하며 그는 청소년 배우들의 성장통을 보듬었다. 2년 전 원광대에서 예술치료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뮤지컬 현장에서 통합예술치료를 겸하는 셈이다.

"발달단계에 따라 배우들도 성장통을 겪게 돼요. 내 분장실은 항상 문을 열어 두죠. 그들의 상담실이 되기도 하고, 쉼터가 되기도 합니다." 그는 유독 청소년들을 사랑한다. 대안학교인 영산성지고와 송학중, 탈북청소년들의 한겨레중·고등학교에서의 봉사활동으로 끊임없이 청소년들을 보듬는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희망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병이 치유됨으로 인해 제가 이생에 받아야 할 과업을 모두 마친 느낌입니다. 그래서 무대에 서면 더 열심히 관객과 호흡하고 할머니가 다 됐지만 가뿐하게 춤을 춥니다. 사람들이 말해요. 저를 보는 자체가 바로 '치유의 순간'이라고들 해요."

죽음, 두렵지 않은 순간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었으면 좋겠어요. 신체의 병도 무섭지만 정신의 병은 더 무서운 것이거든요." 그는 사회가 발달할수록 정신에 병든 사람이 많아 안타깝다는 표현을 했다. "육신의 병은 약이 있고 병명도 있어요. 개인적으로 그것은 행운이라 봐요. 하지만 정신적인 병은 내 놓지 않으면 잘 모르거든요. 마음을 열고 주위분들에게 지지를 받아야 해요.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 손 잡아 주는 곳이 의외로 많거든요."

웅크리지 말고 손을 내 밀어보는 용기를 갖자는 그는 "나눔을 통해 사랑을 몇 배로 불려보자"는 소망을 말했다. 그리고 끝에 한마디 덧 붙였다.
"봉사를 하고 나눔을 생활화하면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 인생은 양보다 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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