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76: 원불교에서 '불신'(不信)이 신앙문이 아닌 수행문에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기독교라면 불신은 아마도 신앙문에 있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에서만 이루어져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입니다. 그런데 불신이 바로 수행문에 있는 것이 바로 원불교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원불교의 수행문에는 수행을 촉진하는 진행사조와 방해하는 사연사조가 있습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사연사조 중에서도 '불신'이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원불교 수행의 목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불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나는 성불할 수 없다는 자기 부정의 중생상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수행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자신 속에 실존하는 부처의 종자를 부정하는 불신일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방해하는 사연사조 중 으뜸이 스스로에게 부처의 종자가 있다는 여래장을 거부하는 불신입니다.

옛날에 부잣집 아들이었던 이태백이 5세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공부에 싫증이 나서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는데, 웬 할머니가 쇠로 만든 절굿대를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걸 갈아서 바늘을 만들 생각이야."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군"하며 웃으니까, "웃을 일이 아니야. 열심히 노력하면 쇠몽둥이도 바늘이 되는 법이야."

쇠몽둥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겠다는 할머니에게서 뒤퉁수를 얻어 맞고 수행을 통해서 오늘의 시성이라고 하는 이태백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중국 마조 스님(709~788)과 그의 스승 회양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님은 좌선하여 무얼하려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회양스님은 암자 앞에서 벽돌 하나를 집어다 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회양스님이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려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겠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어느 의미에서 우리가 성불하는 것은 쇠몽둥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또는 벽돌을 갈아서 거울 만드는 것과 같이 도저히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 같은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불은 여래장의 믿음을 가지고 용맹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래장을 믿지 않는 불신은 수행을 방해하는 사연사조의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한양대·중곡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