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선진 문인 10명, 문학이야기 풀어가

18세기 프랑스의 박물학자로 <박물지>의 저자이기도 한 뷔퐁은 "글은 사람이다"라는 명언을 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 후로도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은 많지만, 그가 그 명언의 원조로서 명예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요컨대 글에는 그 글을 쓴 사람의 인격과 성격과 학식과 생각과 체험 등 한 인간의 총체적 내용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하기야 어디 글뿐이겠습니까? 말에도 행동에도 옷차림에도 인격과 개성은 드러납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요? 제가 지방 도시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 서울서 사업하는 동창이 찾아왔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또 다른 동창을 불러 셋이서 다방에 갔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김사장이니 이사장이니 하고 부르며 농담하다가 다방 마담의 주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짓궂은 서울 친구가 이런 제안을 합니다. "마담이 우리 직업을 맞히면 가장 비싼 차를 마시겠소. 한번 맞춰 보시오." 우리를 전혀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도 그녀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서울 친구는 사업하는 사람이고 나머지 둘은 교사라고 답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다시 교사 둘을 놓고 고등학교 교사와 초등학교 교사를 가려내라 하니 이 역시 금방 맞혔습니다.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소?" 마담이 웃으며 말합니다. "얼굴에 씌어 있잖아요!"


저는 평생 종교문학을 연구하다 보니 외람되나마 이런 명제를 찾아내게 됐습니다. "글은 법력(法力)이다" 작품을 읽고 분석하다 보면, 글 속에 글쓴이의 공부 수준이 드러나고, 깨달음의 정도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여래위가 쓴 글은 여래위로 출가위가 쓴 글은 출가위로 정확히 드러납니다. 얼굴에 씌어 있는 것으로 직업이야 맞힐지 모르지만 한 인간을 속속들이 캐내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글을 보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개중엔 짝퉁도 있죠. 당나라 때 구지선사 이야기 아시죠? 깨달음을 얻은 후엔 누가 불법을 물으면 노상 말없이 손가락 하나만 세워 보였다는 것, 스님이 늘 그러는 것을 본 동자승이 스님 안 계실 때 한번 써 먹었다가 된통 혼났다는 것 말입니다. 손가락 하나 들어 보이긴 마찬가지인데 왜 구지의 경우엔 불법의 대의가 되고 동자승의 경우는 그냥 손가락 하나일 뿐이냐? 진품과 짝퉁의 차이입니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아무렇게 하더라도 아는 것이 나오고, 모르는 사람은 아무렇게 하여도 모르는 것이 나오나니라'(성리품 25) 이 말씀, 기가 막힙니다.


저는 대종사님부터 시작하여 우리 선진님들 가운데 문인이라 할 어른 열 분을 모시고자 합니다. 정산 송규, 삼산 김기천, 응산 이완철, 주산 송도성, 구타원 이공주, 원산 서대원, 대산 김대거, 경산 조송광, 고산 이운권 이렇게 하면 원불교문학의 10인 1단이 됩니다. 단장에 대종사, 중앙에 정산, 나머지 여덟 분은 단원입니다. 그리고 예비단원으로 훈산 이춘풍 정도를 모시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자, 이제 산책을 떠나 볼까요. 추리닝에 운동화 차림으로 올레길 걷듯 가볍게 걸으며 제게 귀 기울이시면 문학공부 뿐 아니라 법공부가 되실 겁니다.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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