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진 교도·부산교당

세상은 빈부귀천의 차와, 상하 선후의 차와, 유무식 지우(智愚)의 차등이 있다. 이 모든 관계를 통칭하여 강과 약 두 가지로 대별한다.

강자는 영원한 강자가 되고, 약자는 강자로 진화하여, 강자와 약자가 다 같이 영원한 강자로 발전하는 진보적·상생상화적 사회발전의 원리를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에서 소태산대종사께서 밝혀 놓으셨다.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모든 관계는 서로 대립 투쟁의 관계가 아니라, 상부상조·상생상화·상신상락(相信相樂)의 관계로 발전해야 함을 밝힌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생존경쟁·약육강식·적자생존 등의 대립투쟁의 관계에서 발전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강자와 약자의 끊임없는 투쟁대립으로 인류세계는 잠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는 것이 또한 현실세계다. 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약자가 되고, 오늘의 약자가 내일의 강자가 되면서 보복과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것이 세계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만물의 관계가 서로 대립과 투쟁으로 이어질 때 전쟁과 혼란이 거듭되고,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게 되는 것이다.

서울 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의 제자 폭행 사건이 세간의 화제이다. 교수가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경우이다. 필자가 학교 발령 초임 시절부터 20여 년 간 맡은 무의촌진료와 친목을 위한 동아리 지도교수 시절, 매 년 지리산 자락의 한 마을로 하계봉사를 갔다. 주말에는 졸업한 선배들이 멀리서 고생하고 있는 후배들을 격려 차 와서는 늦은 밤 지도교수가 잠 든 사이, 졸업기수별로 위에서 아래로 기합을 주는 사이 해당 기의 여학생들 울음소리에 잠을 깨어, 사태를 인지하고는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 나가야할 우리들의 소명의식을 얘기하면서 수 년 간에 걸쳐 악습을 고쳐 나가도록 노력한 결과, 동아리 내 폭력을 근절 시킨 일이 생각난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폭력의 저변에는 오로지 나만 있고 상대에 대한 배려는 손톱만치도 없는 상황이며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불평등 협약에서 보는 것처럼 조직이 크면 클수록 더욱 교활해져 그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우에서도 선진국들이 보호관세와 정부주도의 산업정책으로 성장을 이루어왔건만 그들의 뒤를 따르려는 개발도상국에게는 자유방임과 시장경제를 강요하는 강대국의 억지는 한 마디로 '사다리 걷어차기'로 표현되고 있다.

원불교가 목적하는 일원세계는 모두가 강자요 모두가 승자가 되는 이른바 윈-윈(win-win) 전략에서 보는 것처럼 영원한 평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강자는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약자를 보호해 주고 진화시켜야만 영원한 강자가 될 수 있고,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아서 항상 배우고 힘을 길러가야 약자도 강자로 진화하게 된다.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거나 이용하는 데에서 자기발전의 원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약자는 강자를 원망하거나 대항하는 데에서 자기발전의 원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강자를 선도자로 삼아서 배우고 힘을 기르며 조화를 이루어가는 데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강자가 일시적인 강에 만족·자만하여 자리타해로 약자를 억압 박해하면 언젠가는 약자로 전락하여 도리어 억압과 박해의 과보를 받게 된다. 약자가 일시적인 약에 자포자기하거나 강자에게 반발 대항하기로만 일삼으면 상극의 악연으로 인하여 강자로 진급할 수도 없고 영원히 약자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투쟁으로 얻은 승리는 언젠가는 다시 투쟁으로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 속에서 지식층과 무식층, 자본가와 노동자, 부자와 빈자,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이 서로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조화와 공존을 이루어가는 것이 인류사회의 영원한 번영과 평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를 아는 우리 원불교인들은 '사다리 걷어차기'보다는 사다리를 잡아주어 영생을 위한 보험을 평소에 부지런하게 들어 정당하고 영원한 강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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