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당해도 공이 우선 되어져야 한다"
교화·교육·자선 삼박자 교화, 지역 위한 마음과 신뢰가 우선

▲ 고창 원광참살이 앞에서 교전을 봉독하고 있는 정상훈 교무.
교화란 무엇인가? 교단의 오랜 화두다. 그만큼 오롯해야 한다. 실마리를 풀기 위해 일직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뚝 선다.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한 고창 원광참살이 앞에서 만난 정상훈(69) 교무가 그랬다. 교화에 대한 열정과 공심 신심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는 "교화를 하는 동안 어떤 일을 당해도 공이 우선 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속한 단체도 성공하고 개인도 성공한다. 사적으로 기울다 보면 공도 안되고 사도 안된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것을 위공반자성(爲公反自成)으로 보았다. 공을 위하는 것이 도리어 자기를 이룬다는 것이다. 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의 말속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설득력이 있다. 이것은 그가 35년 동안 농촌 교화를 하면서 느낀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후진들에게 교화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어차피 전무출신하기 위해 교단에 들어온 이상 정신, 육신, 물질을 바쳐 교단과 사회와 이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한다"며 "일이 잘 안되면 교단과 사회를 원망할 수 있으나 사량계교없이 최선을 다하면 그 가운데 성공이 따라온다. 개인도 성공하고 교당과 교단도 성공한다"고 부연했다.

고창교당의 여러 시설과 학교법인 원진학원이 지역 사회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그의 사심없는 공심과 신심의 결과물이다.

삼박자 교화에 바탕한 지역 사랑

그가 고창교당에 부임한 이래 교화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20년 간 지역민들의 신뢰를 얻은 것이 한 몫했다. 이것은 관촌교당에서 14년 간 근무하면서 행한 지역사회에 대한 불공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바쁜 농촌의 일손을 돕기 위한 농번기 탁아소 운영이 원광어린이집의 시초가 되어졌고 고령화를 대비한 노인 문제를 고민하다 원광수양원을 설립했다. 지역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과 대종사의 은혜를 심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성공의 토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고창교당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관촌교당 이임 후 전주 근처 어려운 교당을 주면 한판 크게 벌리고 싶은 염원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고창교당에 발령이 났다"고 말한 뒤 "정초기도를 시작하면서 고창에 보내진 큰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고창지역의 교화 밑그림을 그렸다. 외적으로 원불교가 이 지역 사회에 필요한 것과 지역사회에서 원불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모든 가족이 맞벌이로 보육과 교육의 문제가 대두될 것을 생각하여 안심하고 맡기고 자신의 일에 충실할 수 있도록 어린이집을 설립했다. 또한 사회가 함께 어르신을 책임지고 효를 해야 하는 시대를 대비해 노인시설을 설립하고 일자리를 만들어 지역사회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했다. 내적으로는 오로지 정성스런 기도와 교도들의 순교에 정성을 기울였다. 사은님의 은혜와 대종사님의 성령이 감화할 수 있는 기도의 일념으로 진리의 감응을 얻고 상담과 순교를 통해 교도들의 어려움을 살폈다. 현재 있는 교도들이 교무를 무한신뢰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불공을 했다. 이와 더불어 큰 일을 할 때 도와주는 조력자로서 교당의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역사회의 교도를 만드는 노력도 빼놓지 않았다"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내외적으로 그물을 치고 정성을 기울인 교화가 세월이 흐르자 눈에 보이게 성과가 나타났다. 교도 숫자가 매년 증가하고 원불교에 대한 지역사회에서의 신뢰도가 높아졌다. 이러한 결과 교당 교화는 물론 지역발전을 위한 사업들이 확장됐다. 사회 변화와 지역 형편에 맞는 교화에 대한 고민이 성공을 가져왔다. 고창 원광어린이집의 건축을 시작으로 고수 원광어린이집 개원, 고창 원광효도의 집 개원, 무료급식소, 무료도시락 배달, 지평선중학교 개교, 고창 원광보은의집 개원, 고창 노인복지 센터 설립, 원광 참살이, 지평선고등학교를 개교하게 됐다.

그는 "부촉품 15장에서도 교화·교육·자선이 병진되어야 결함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교육 평등은 교육이요, 사회 평등은 자선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교화로 모여지게 되어 있다"며 "지역과 지역에서 그 역할을 할 때 양적인 교화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농촌교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일생을 농촌교화를 위해 살아 왔던 만큼 농촌현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원불교가 농경사회에서 출발하여 성공했다. 과거의 농촌은 원불교의 토대였고 뿌리 역할을 해 주었다. 교단에서는 농촌이 어려울 때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있어야 하고 농촌교당 교무들은 그 지역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하는 사명의식이 필요하다. 농촌현장을 찾아가는 순교자요 독거노인들의 말벗이 되어 주는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며 "그 지역민들이 원불교 은혜로 산다는 것을 느낄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후 가능하다면 '농촌교화 연구소'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정보화, 국제화 사회 대비가 관건

그의 교화 이야기는 생활관 응접실에서도 계속됐다. 그는 교화할 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된 것을 바탕으로 정보화, 국제화 사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교화를 하려면 실질적으로 해야 한다"고 당부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교화가 현실 지표를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교화에 대한 당당함은 흙 건축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는 대안학교인 김제 지평선·중고등학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학생들의 인성도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교사모집과 학생모집은 투명성 있게 하고 있다"며 "고등학교를 개교한 이유는 인문학에 바탕한 인재양성에 있다. 앞으로 학교발전기금 모집과 영성센터 설립을 비롯 작은 대학을 만들어 선진국 대학과 교류하는 것이 멋 훗날의 꿈이다. 후진들이 이 일을 계속해 나갔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고령화 사회와 연관된 복지시설도 그의 지대한 관심사다. 쾌적한 환경조성과 질적인 서비스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시설 관계자들은 월요일 10시부터 1시간 정도 공사법회를 보면서 마음공부를 하고 있다. 설명기도와 교전봉독을 한 후 경강을 하고 있다. 직원들이 신심과 공심이 살아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교법이 직원들 마음 속에 스며들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원아들과 어른신들에 대한 서비스가 충실하다.

그의 이러한 교화 신념은 어느 선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첫 부임지인 용각교당에 나가기 앞서 건네준 일생 생활표준은 그의 삶의 지침이 됐다. 친필 편지는 '못나게 살고, 진실(眞實)하게 살고, 고(苦)되게 살고, 천(賤)하게 살고, 져주면서 살자'는 내용이다.

교당의 안정과 기관이 설립된 이후에도 자신을 다시 점검해 볼 수 있는 은혜를 받았다. 말년의 그에게 내린 노담(老談)이었다. '능하더라도 모자란 듯이 하고 여유롭더라도 검소하며 공을 쌓을수록 하심하여 교만해지는가 방자해지는가 살펴라. 사업이 중요하나 교화가 앞서야 하고 교화가 중요하나 공부가 우선이다.'

그는 "이 말씀들이 저를 되돌아 보게 한다. 정말로 조심하면서 이 공부 이 사업에 누가 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년이 연장된 만큼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하고 있다"며 "그동안 지역에서 성과를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김수영 교무를 비롯한 교무진들의 일심합력 덕분이다. 너무 고맙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봄 햇살 한줌이 그의 얼굴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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