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애는 평면이 아니고 입체이며 입체 중에서도 다면체입니다. 그것도 정지된 시점의 다면체가 아니라 시간 따라 흘러가는 다면체입니다. 그나마 다이아몬드나 크리스털처럼 규칙적이고 정교한 결정체(結晶體)가 아니라 울퉁불퉁 삐뚤빼뚤, 아! 잡기 힘듭니다.

소태산의 생애 역시 함부로 아는 체할 수 없는 다면체입니다. 성인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보고 한 말 아십니까? "나는 새가 날으는 것을 알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알고 길짐승이 달리는 것을 안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로 잡을 수 있고 날으는 것은 화살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라면 내가 알 수가 없다.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노자를 보니 그는 용인가 싶다." 하물며 저 같은 중생이 소태산이란 용을 감히 낚으려 하다니 웃기죠? 웃으세요.

조혼하던 시절, 혼인 후 처음 맞는 새해를 맞아 처가에 인사드리러 간 16세 꼬마신랑이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고소설 읽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 중 〈조웅전〉과 〈박태보전〉을 듣다가 도사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납니다.

산신을 만나려고 4,5년 삼밭재를 오르내리던 그는 '삼령기원상'을 졸업하고 이때부터 스승 찾아 고행하는 '구사고행상'으로 접어듭니다. 문학이 소태산의 종교적 생애에 큰 굴곡을 만든 것입니다. 도사나 이인인 줄 알고 엉뚱한 사람한테 둘린 이야기도 있는데 그 중에 시 읊는 거지한테 혹해서 낭패 본 일도 있죠. "큰 꿈을 누가 먼저 깰꼬? 평생을 내 스스로 아노라(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제갈량의 이 시 한 구절에서 범상치 않은 의미를 포착하는 직관력, 이것이 소태산의 문학적 감수성입니다.

〈조웅전〉 이후 10년 만에 노루목에서 대각을 이룹니다. 그 환희를 시로 읊으니 저 유명한 대각송 "맑은 바람에 달 떠오르니 만천하가 절로 밝도다(淸風月上時 萬象自然明)"입니다. 이 평범한 시구 속에서 숨어 있는 금맥을 캐낸다면 여러분도 오도의 진미를 맛볼 수 있을 텐데…. 어렵다구요? 코풀기보다 쉽다고 했는데 힘냅시다. 아무튼 이 시가 나오는 순간에 원불교문학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소태산의 제자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뒤섞여 있는 데다, 유무식 역시 동참하였습니다. 정산, 삼산, 팔산 혹은 팔타원, 구타원처럼 유식한 제자가 있는가 하면 태반은 언문조차 깨치지 못한 무식한 대중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소태산문학의 양면성이 나타납니다. 소태산의 문학은 깨달음(성불)에다 경륜과 포부를 담은 것과, 깨우침(제중)에다 발심과 조흥을 실은 것으로 나누어집니다. 앞의 것은 가방끈이 긴 엘리트 먹물들을 상대하여 한문으로 썼고 뒤의 것은 가방끈이 짧은 대중을 상대하여 한글로 썼습니다. 한문은 주로 선시(禪詩)요 한글은 주로 가사(歌辭)입니다. 정교하게 다듬지는 않았지만, 똑 부러지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소태산문학을 접하다 보면 한글로 쓴 가사든 한문으로 쓴 선시든 그 탁월함에 놀라게 됩니다. 〈회성곡〉이나 〈안심곡〉 같은 장편가사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짧은 〈만장〉조차 그 꾸밈새와 말재간이 정말 예사롭지 않습니다. 선시도 그렇습니다.

당대 최고의 선승 백학명이 여지없이 깨지지 않았습니까? 언제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정산 종사가 '생이지지(生而知之)'라 평한 것입니다. 날 때부터 알았다는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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