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운데 걸어 놓고 공들이는 것이 있나요?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성품의 진체, 관조로써 깨쳐 얻으라

▲ 홍숙현 교무/광주전남교구 비아교당

〈정전〉 교의편 제1장 일원상 중에서 마지막 제6절이 게송입니다.

예로부터 많은 선사들은 자신의 깨달음을 시로 노래해왔습니다. 선(禪)은 종교요, 시(詩)는 문학인데 선과 시를 하나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시도는 달마선사 이래로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달마로 부터 시작된 선종이 양분 되는 시대에 접어들어 이름을 크게 날린 두 사람의 선사, 남쪽의 혜능, 북쪽의 신수도 자신들의 깨달음을 그 유명한 게송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도 깨달음의 세계를 게송으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라고 했듯이 말과 글, 즉 분별의 세계를 넘어선 깨달음의 세계를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나 노래, 시라는 표현을 통해 그 세계를 비유하고, 암시하고, 상징하고 영탄하는 도구, 게송으로 표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게송이 시대의 변천 속에서도 줄기차게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종경〉 성리품 31장에서 게송을 내리신 후 "유는 변하는 자리요 무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며, 돌고 돈다, 지극하다 하였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하여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 있으리요,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량으로써 알아낼 수 있는 자리는 아니나, 진리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은 공부의 근기에 따라 다르게 밝혀주셨습니다.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38장에서는 "그대들이여 화두를 들고 지내는가. 화두를 연마하는 데에는 의리선(義理禪),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을 차서 있게 병행함이 옳으나, 과거의 선방 공부 같이 온 종일 화두만 계속할 것이 아니요, 화두를 마음 가운데 걸어 놓고 지내다가 마음이 맑고 조용할 때에 잠깐 잠깐 연구해 볼지니라. 그러하면 마치 저 닭이 오래 오래 알을 품고 굴리면 그 속에서 병아리가 생기듯 마음의 혜문(慧門)이 열리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의리선이란 것은 경전이나 선어록의 이론을 보고 눈치채서 터득하는 것이요, 여래선이란 것은 참선을 하다가 공(空)의 도리를 보아서 천지일공(天地一空)의 절대평등 경계를 보는 것을 말하며, 조사선이란 것은 공(空) 도리에 한걸음을 넘어서 평등 가운데 차별 도리가 완연한 것을 긍정하는 것을 이른다고 흔히 말합니다.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역시 구족이라.

한 교도님이 이 부분을 읽고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그러면 있던 사람도 없는 사람이 되고, 없던 사람도 있는 사람이 되는 돌고 도는 세상이 된다는 겁니까? 요즘 같은 세상은 개천에서 용나기 어려운데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을 못한 터라 조금은 당황스런 감상이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자신이 갖고 있는 지금 현재의 관심사, 생각의 틀(프레임·Frame)로 본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프레임, 어떤 조건에 대해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프레임을 '마음의 창'에 비유하곤 합니다.

즉 어떤 대상 또는 개념을 접했을 때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설교도 결국 자신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요? 그 교도님은 지금 한창 재산과 학력(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결국 잘사는 집 아이들이 좋은 대학도 가고 성공도 하더라…)에 민감해있던 터라 유라함은 있는 재산, 학벌로 보였나 봅니다. 각자 자신의 처지와 공부 정도에 따라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으로 정신의 세력을 확장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감상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계속 더 연마해봅시다. 라고 마무리 지으면서 그 교도님의 질문으로 게송이 더욱 마음 속에 품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유(有)라 함은 있는 것, 나타난 것(顯),색(色),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세계…천지기분이후(天地己分以後)의 현상세계로 볼 수 있으며 무(無)라 함은 없는 것, 숨은 것(隱), 공(空) 경계 이전 한 생각나기 전(一念未生前) 마음세계,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상태를 말합니다. 눈을 떴다 감았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잠이 깼다 들었다, 경계로 괴로운(좋은, 즐거운) 생각이 들었다 안 들었다…. 삶, 생활 그 자체가 다 유무의 세계 진리 그대로입니다.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역시 구족이라

돌고 돌아의 표현은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순환되는 의미도 있지만 일원상 서원문의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유상으로 보면…무상으로 보면….'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한 세계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진리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의리적으로는 이렇게 저렇게 눈치챌 수 있으나 결국은 관조로써 깨쳐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조로써 깨쳐 얻으려면 공을 들여야 합니다. '화두를 마음 가운데 걸어 놓고 지내다가 마음이 맑고 조용할 때에 잠깐 잠깐 연구해 볼지니라. 그러하면 마치 저 닭이 오래 오래 알을 품고 굴리면 그 속에서 병아리가 생기듯 마음의 혜문(慧門)이 열리리라.'

먼저 의문나는 무언가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품지 않으면 얻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언제 결실이 있어지냐? 그 공이 극에 달해야 합니다. 극하면 변한다는 말씀과 같이 극에 달해야 변합니다. 99도에서는 절대 끓지 않는 물도 100도가 되어야 끓어 수증기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말콤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보통 사람들의 범주를 뛰어넘어 성공한 사람들)에서 공들이는 시간을 일만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일만시간, 매일 3시간 공들여서 10년을 투자해야 이룰 수 있는 시간입니다. 좌선이 잘 안될 때 공부가 잘 안될 때 낙망하고 있으면 스승님들께서 '10년은 해봤냐? 10년 해보고 된다 안된다 해라…'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깨달음의 달 4월, 여러분은 무엇을 품고 있습니다. 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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