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치유에 도전하는 전희식 농부

▲ 가끔은 봄나들이를 즐기는 전희식(왼쪽)씨와 어머니.
▲ 장수군 덕유산 기슭의 작은 마을에 터를 잡은 집. 마당에 휠체어가 나들이 나갈 준비중이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를 세밀히 살필 기회를 갖기 어렵다. 그러나 부모는 어떤가. 낳고 기르고 가르치면서 온 정성을 다한다. 그러는 사이 떼어 낼 수 없는 긴 인연의 끈을 또 하나 갖게 된다. 부모의 보살핌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자녀들. 화창한 봄날에 만난 농부 전희식(54)씨는 "어머니를 직접 모시기 이전에는 어렴풋이 어머니를 이해했다"고 고백했다.

어렸을 때는 어려서 몰랐고, 사회생활하면서는 떨어져 사니 한 번씩 뵙는 부모를 어찌 잘 알 수 있겠는가. 그가 전북 장계 남덕유산 자락으로 귀농을 해 어머니를 모시고 산지 5년. 자연치유 덕분인지 치매 어머니(김정임· 90)는 생사(生死)의 고비를 넘나드는 긴박한 상황과 줄다리기를 하며 그의 곁에서 무사하다.

요즘 전국 방방곡곡엔 편리한 노인요양원, 요양병원이 즐비해 있다. 그러나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치매 노모를 극진히 모시는 전희식 씨. 자연과 함께하는 그의 일상을 들여다 봤다.

노모와 함께하는 삶

그는 장수군 장계면의 산골짜기에서 어머니를 모시게 된 까닭에 대해 "귀도 멀고 똥오줌도 잘 못 가리는 어머니가 계실 곳은 서울이 아니라 생각했다. 더구나 사시사철 두 평 남짓 안방에서만 지내며 밥도 받아먹고 똥오줌도 방에서 해결하는 것은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노쇠한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가두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파란 하늘도 보여드리고 바위와 나무, 비나 눈, 구름도 보여 드리고 싶었다"며 "철따라 피고 지는 꽃도 보시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계곡의 바람결도 느끼고 크고 작은 산새들이 처마 밑에서 노닥거리는 것도 보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두 칸 방에서 보다 자연과 함께 할 때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집을 고쳐 짓기 시작한 지 6개월. 어머니를 장계 산골 집에 모셨다. 그와 어머니가 사는 집은 해발 600미터이다. 사람 살기 가장 좋은 위치이다. 그래서일까. 치매 어머니는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그를 놀라게 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 말. 펄펄 눈이 오는 창밖을 내다보고 "저기 눈 아이가? 눈이 다 내리네. 이기 몇 년 마이고"하고 눈을 반겼다. 어머니는 "세상 참 좋아졌네. 눈 내리는 것도 다 볼 수 있고"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갔다. 그럴 만도 했다. 어머니는 10년 이상 방안 생활만 한 것이다. 잿빛 하늘과 작은 창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바깥. 형광등 불빛에 의지한 생활. 냉방기와 난방기가 정해 놓은 온도에 맞춰 방안에서 사계절을 다 맞이하는 세월을 살았다. 그래서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낮인지, 밤인지 모른 채 살았던 나날이었다.

요즘 어머니는 그와 함께 감자 눈을 따고 감자를 심고 거두기도 한다. 들깨를 심고, 베어 털고, 가을에는 고구마를 캐 자녀들에게 나눠준다.

이렇듯 변화되는 어머니를 보며 그는 "어떤 책으로도 배울 수 없는 진리를 배운다"며 "큰 선물을 어머니가 주고 계신다"고 말했다. 그가 어머니에게 받은 선물은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노인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놓는 시기이다. 사랑도 놓고 몸 까지도 놓는 것이다. 놓기 때문에 노년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것이다"고 어머니와 함께한 그간의 느낌을 말했다.

모두가 깨어나는 생활

요즘 그에게 가장 많이 물어오는 질문이 있다. "어머니는 많이 좋아지셨느냐"는 말이다. 그는 "못 걸어 다니시던 어머니가 걸어 다니고, 대소변 잘 못 가렸는데 이제는 좀 가리게 됐다고 어머니가 호전됐다고 볼 수는 없다. 아니 그것으로 좋아졌다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치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준을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어머니는 현재의 그 모습 그대로가 정상인 것이다. 하지만 의학적 소견으로 보아 치매이고, 환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대상을 놓고 좋고 나쁨은 없는 것이다"는 의견이다. 이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는 다양한 수련과 마음공부, 단식을 통해 수행을 거듭한 결과물로 설명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화가 나고 힘들고 막막할 때 그 감정을 어머니에게 되돌려 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곧 바로 알아차렸다. 화가 나는 현실을 내 마음이 어떻게 직시하고 체득하느냐. 그 순간의 마음은 회광반조를 통해 볼 때 결국 고통도 쾌락도 없음을 보게 되니 어머니가 발현하는 모든 것이 은혜로 보였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5년 동안 생사고락(生死苦樂)의 파도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늘 깨어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듯 했다.

노년, 치유의 삶이 되도록

그는 "형편만 되면 모든 자녀와 부모들이 자연과 함께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렵다고 생각 말고 3~4 가구가 함께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았던 어르신들의 비효율적인 요양원 생활을 지적했다. 그는 "뜻 있는 기관에서 좀 더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복지 정책을 자력적으로 시도해 모범적으로 운영하면 우리나라의 복지 시스템이 달라질 수 있다"고 효율적인 요양원 운영에 대해서도 건의했다. 그가 자연과 함께하며 체득한 다양한 노년의 삶에 대한 이론들. 귀 기울여 지는 말들이다.

또 노년의 생활은 '치유의 기간'이어야 한다. 한 평생 가슴속에 담아둔 갖가지 사연들을 풀어낼 때 다음생(來生)은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노모가 때때로 쏟아내는 거친 말에 대해 "욕은 억압된 발현이다. 어제도 손톱으로 어깨와 손등을 쥐어 뜯겼지만 그런 어머니를 사랑한다. 미워하지 않는다. 그런 모습도 보듬는다"고 말했다. 모자(母子)간의 조건 없는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 어떤 모습도 '인정'하며 품어 줄때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없다. 하지만 요양원에서는 이러한 삶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어르신을 모시는 자세에 대해 "가장 먼저 준비할 것은 마음공부 즉 자기성찰이다"며 "나를 힘들게 하는 것마저도 그 본질은 나를 키우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요양보호사에게 마음공부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음공부가 바탕이 될 때 모든 대상을 상생의 관계로 승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원만한 공동체 생활이 가능하다. 그는 치매 어머니와 함께하며 다양한 증거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전희식 농부는 1958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 곡절많은 학창시절과 청장년기를 거쳐 1994년 전라북도 완주로 귀농. 5년 전 치매가 있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장수군의 덕유산 기슭 작은 마을에 터를 잡았다. 대안교육과 대체의학, 몸살림과 마음살림 등 '총체생명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 무주 푸른꿈학교에서 3학년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보따리학교'와 '100일학교'에도 열성이다.
저서로는 치매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 〈똥꽃〉, 〈엄마하고 나하고〉와 귀농생활을 정리한 책 〈아궁이불에 감자를 구워먹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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