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벚꽃 바람에 흩날려….
▲ 변산성지의 봄. 유록빛 신록 사이로 연분홍 꽃잎이 흐드러지게 날리고 있다.


여기 봉래산 기슭은 지금 온통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유록빛 신록 사이로 연분홍 꽃잎들 흐드러지게 날리고 있다. 그 분이 계시던 그 봄도 이렇게 화사했을까?

그 꽃잎 날려 석두암 초당 마루에 분분하던 날, 그 분도 일원대도 법 그물 짜시던 일손 잠시 놓고 초당 앞을 거닐며 이 봄산의 절정에 휴식 같은 미소로 화답했을까?

손수 군불 지피시며 짠지에 허기진 보리밥 한 술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 저 어린 봄동나물이 그 분의 입맛을 돋우었듯 허허 몽중(夢中) 그 꽃잎들 그 분 도와 천지공사 일조 했으리라.

석두암 터에 앉아 나름 소태산의 봄날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이 봉래산은 왠지 사람의 아들인 소태산의 인간적인 면모와 향기가 짙게 느끼지는 곳이다. 그래서 더욱 원음의 소리가 육성으로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순례객들이 이 성지를 다녀가지만 한 성자의 법을 이해하고 그 인격의 깊이를 가늠하는 일은 온전히 자기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내 깊이만큼 내 넓이만큼 그렇게 소태산은 우리들의 내면에 현존한다. 그러니 감히 오늘 가슴으로 느껴보는 소태산은 나만의 그 분이시다.

교단 최초의 조실 석두암
▲ 봉래정사 석두암 터.


실상초당에 점점 찾아오는 제자들이 많아지자 소태산을 보필하던 김남천, 송적벽은 부족한 숙소 걱정에 새 집 마련을 발의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을 안 월명암 백학명 선사는 실상사 거북바위 옆에 집터를 주선해주고 재목까지 보조하여 소태산의 새 거처 마련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원기6년 7월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송적벽은 터를 닦고 축대를 쌓으며, 김남천은 목수 일을 맡고, 이만갑과 구남수는 식량과 일체 잡비 조달을 도맡아 동년 9월에 드디어 두 칸 초당을 완공한다.

박용덕 교무는 그의 저서 〈초기교단사 2〉권에서 석두암 초당의 당시 풍경을 이정화 선진의 구술 자료에 의해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석두암 2간 초당은 흙과 짚을 잘 개어 쌓은 흙집이다. 외벽은 벽회를 발랐고 방안 천장을 만들고 벽에 도배를 하였다. 2간방은 가운데 칸막이를 지르고 뒷면에는 각각 벽장을 넣었으며, 세창살 여닫이 쌍문을 달고 각방의 측면에 외문을 내었다. 방문을 열면 전면에는 조금 넓은 마루, 좌우에도 반간 정도씩 마루를 달았다. 초당 우측에 아궁이를 내어 두 방에 군불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나무 기둥을 세워 거적을 올려 비바람을 막았다."

소태산은 이 집을 석두암(石頭庵)이라 이름하고 이때부터 스스로를 '석두거사'라 칭하게 된다. 초당 방문 위에는 백학명선사가 써준 검은 판자위에 흰색 글씨의 '석두암' 현판을 걸었다 하니, 소태산과 학명선사의 깊은 교류와 우정을 이 건축과정을 통해서도 다시 엿볼 수 있다.

박용덕 교무는 석두암을 교단 "최초의 조실(祖室)"이라고 말한다. 이는 처음으로 소태산의 단독 거처가 생겼다는 의미다. 그러나 윗방은 소태산의 처소요, 아랫방은 남자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석두암은 설법을 듣고 공부할 때는 가운데 미닫이 칸막이를 트고 대중의 집회장소가 되었으니 기실 반듯한 조실이랄 수는 없을 터다. 아무튼 소태산이 기거한 이 최초의 조실 석두암은 이제 그 터만 남아 중생을 껴 안고자 했던 열망으로 가득 찬 30대 초반의 삶을 아련하게 추억하게 한다.

첫 교서 초안지
▲ 천왕봉 아래 실상사. 한국동란시 소실됐다.1943년 촬영.


석두암이 완공되고, 승려들과의 교제가 많아지면서 소태산의 불교 연구도 더욱 활발해졌다. 이 때 소태산은 불교의 모든 교리와 제도, 예법 등을 일일이 청취하시고 정산을 비롯한 제자들과 더불어 새 회상의 첫 교서 초안을 위해 분망하신 끝에 드디어 최초의 교서 〈조선불교혁신론〉과 〈수양연구요론〉의 초안을 내 놓게 된다.

소태산은 대각 후 금강경을 보시고 무상대도(無上大道)인 불법에 연원을 댔으나, 변산에서 기성 불교의 제도와 교리의 실상을 접한 후로 불법의 시대화ㆍ생활화ㆍ대중화의 시급함을 느꼈던 것으로 이해된다.

모든 성현들이 시대를 따라 출현하는 이유는 바로 그 시대의 징표를 읽고 그 시대의 언어로 그 시대의 민중을 향하여 교화의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변산은 시대불이신 소태산의 불교 혁신의 메카다. 소태산은 〈조선불교혁신론〉을 통해 무상대도인 불법의 본질을 회복시켜 후천개벽 시대의 주체적인 교법으로서의 불법의 위상을 다시 정립하고자 했다.

그 후 원기20년에 완성된 〈조선불교혁신론〉은 총론 7개의 목차로 '①과거 조선사회에 대한 불법의 견해 ②조선 승려의 실생활 ③세존의 지혜와 능력 ④외방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 ⑤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 ⑥분열된 교화과목을 통일하기로 ⑦등상불 숭배를 불성 일원상 숭배로'라고 되어 있다.

이 내용들은 현재 〈대종경〉 서품 15~19장에 수록되어 있지만 그 원문을 통해 소태산의 육성을 더욱 가깝게 들을 수 있다.

혁신론을 통해 본 소태산의 불교 개혁의지는 불법을 세상 속으로 이끌어내려는 불법의 시대화ㆍ생활화ㆍ대중화에 있다. 이것은 곧 원불교의 사명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원기100년을 앞둔 오늘 날 우리는 소태산의 불교개혁에 대한 이같은 언명을 과연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 준엄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변산 원광선원/ 강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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