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의 문학작품

앞에서 소태산의 문학작품이 대중을 위한 가사와 엘리트를 위한 선시라는 두 갈래로 나뉜다 말했지만, 사실 소태산의 문학은 생각보다 폭이 넓습니다. 불경이나 성경이 문학적이듯이 소태산의 법문에도 문학정신은 숨쉬고 있죠.

예컨대 〈일원상서원문〉이나 〈참회문〉 등 경문이나 〈성주〉 〈게송〉 같은 주송류에도 문학은 들어 있고, 선진님들이 받아 적은 수필법문 등에도 에세이 문학은 적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들을 다 언급할 수 없음이 안타깝지만, 맛보기로 가사와 선시 한 편씩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여봐라 남주야 말 들어라/나도 또한 중생으로/세상에다 밥을 두고/매일 통곡 이러하며/어찌하여 알아볼까/어찌하여 생사고락 그 이치며/우주만물 그 이치를 알아볼까/이러구러 발원하여/이 산으로 가도 통곡/저 산으로 가도 통곡/…의식 도리 전혀 없이/일일삼시로 먹는 것이/구설음해 욕이로다.'
통곡으로 일관하며 고행하는 모습이 눈물겹지만 하루 세끼 먹는 것이 밥 아닌 구설음해라는 말엔 해학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태산의 낙천성입니다. 그러니까 제목은 〈탄식가〉로되 마무리는 '춘추법려로 놀아보자/에라 낙화로다'입니다. 우리 교법(춘추법려) 대로 '수도하자'가 아니고 '놀아보자'라니 기발합니다.

그런데 더 기발한 건 '에라 낙화로다'입니다. '꽃 떨어진다(落花)' 속에는 하나의 씨앗이 땅에 묻혀 싹이 트고 자라서 꽃을 피우는 생의 절정을 넘어 마침내 결실에까지 도달하는 일련의 과정이 함축돼 있습니다. 비약이 숨어 있습니다. 꽃이 지면 슬픈 것이 아니라 '꽃이 지는 것이 곧 열매를 맺는 축복'이라 보는 것이 소태산 식의 낙관주의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잖아요?

邊山九曲路/石立聽水聲/無無亦無無/非非亦非非

톡 까놓고 말하자면 문학은 '석립청수성'(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이 한 구로 오케이랍니다. '돌과 물'이 살아서 소통하는 세계가 진리계입니다. 여기서 주산 송도성 종사가 전하는 법문(대종사 약전)이 절로 생각나네요. 실상사 한만허 스님이 "江流石不轉(물은 흐르나 돌은 구르지 않는구나)" 합니다. 이에 소태산은 "石不轉江不流(돌이 구르지 않으면 물도 흐르지 않소)" "石亦轉江亦流(돌도 구르고 물도 흐르오)."

서양의 자연철학사를 읽다보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설(萬物流轉說)과 파르메니데스의 만유부동설(萬有不動說)의 대립을 만납니다.

물은 흐르나 돌은 안 구른다고 보는 것은 사물의 표면만 본 것이죠. 소태산은, 변하지 않기로 보면 물이나 돌이나 불변이지만(만물부동설) 변하기로 보면 돌이나 물이나 어차피 다 변하는 것(만물유전설)이라 일러 주는 것입니다.

요새 소설가 이외수의 '我不流時不流'(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라는 책이 나왔더군요. 집히는 구석이 있습니까? 소태산문학 따로 책 한 권 썼으니 여기서 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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