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기 교도 / 신림교당
특정 종교의 신자 수가 늘고 있는지, 혹은 줄고 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의 수가 점차 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체감할 수 있다.

칼 맑스의 말대로 '종교는 아편'이라면 이젠 그 약발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다. 종교(특히 오래된 종교)가 가지는 판타지적 요소가 똑똑한 현대인에게 어필하기엔 분명 한계가 있을 터이니 약발이 떨어질 만도 하다.

원불교는 그런 측면에서 상당히 현대화된 형태의 종교이다. 원불교엔 기성종교의 신학(dogmatics)이 가지는 독단(dogma)보다는 일상생활을 원만하게 수행하는 마음공부가 주를 이룬다.

법회에 참석해 교무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원불교는 차라리 종교라기보다는 도덕수양에 가깝게 느껴진다. 지적이고 논리적인 현대인에게 충분히 매력적일 만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주변의 대학생 친구들은 원불교의 이러한 장점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니, 좀 더 아프게 말하자면 원불교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쯤 되면 '나는 원불교 청년이다'를 기치로 내걸었다는 것이 민망할 정도이다.

나는 원불교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그 원인을 투자의 부족이라 확언할 수 있다. 사방이 교화대상인 대학교 교정을 거닐며 과연 원불교가 청년교화에 뜻이 있는지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도리어 대학생 교화에 가장 확실한 효과를 보이고 있는 '학사(學舍)'제도에 대해서 그 효율성을 트집 잡는 형편이다. 나만해도 신림학사의 훈련 프로그램들을 통해 재미를 느끼고 마음공부를 하고 있으며, 청년교도들 사이의 인적교류를 통해 신심도 깊어졌음은 물론이다. 도대체 어떤 교화활동이 이 정도의 효율을 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높으신 분들의 판단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재화의 효율적 분배라는 기본적인 경제법칙을 종교단체라고 피해갈 순 없을 것이다.

원불교 입장에서도 대학생 교도보다는, 빠르게 가시적인 효과를 보이는 일반교도에 투자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일반교도의 신심은 물론이거니와 헌공금에 있어서 보이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기투자'에 집중하기엔 원불교는 이미 상당히 노화(老化)되어 있다.

사람이 자산인 종교단체에 청년교도에 대한 투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그런데 원불교는 어찌된 판인지, 청년교화에 있어서 만큼은 '진심은 통할 것'이라는 지극히 비논리적 경제판단을 반복하고 있는 느낌이다. 진정으로 인적·물적인 투자를 해야할 곳에 투자가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원불교가 가진 현대적 매력들을 감안해 봤을 때 현재의 청년교화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이대로 가다간 기성교도들이 은퇴하는 향후 30년 이후의 교세가 불투명하다. 원불교는 청년교도의 교화활동에 대해 좀 더 과감하게 배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배팅은 좀 더 현실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일선에서 일하는 교무들에게 다짜고짜 청년교화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열심히 교화활동을 할 수 있게끔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진심'은 통하겠지만 그것이 곧'공짜 점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불교는 이제 그 모든 물(物)적, 심적 역량을 청년교화에 집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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