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원 중인 실상사 전경.
실상사의 복원

요즘 실상사가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복원불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실상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초의선사(草依禪師)가 창건한 사찰로, 내소사, 개암사, 청림사와 더불어 변산의 4대 명찰이다. 이 중 실상사는 여러 사찰을 총괄할 만큼 규모가 컸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후 오래도록 빈 터만 숲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미륵전과 산신각에 이어 지금 대대적인 복원불사를 계획하고 있다.

서해안 시대가 열리고 새만금 프로젝트가 가시화되면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내변산의 제법성지와 실상사 주변 등산로는 이제 매주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4~5천명에 이르는 명소가 됐다.

워낙 산세가 빼어난 곳이라 험산궁곡임에도 불구하고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지만, 순환도로가 뚫리고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내변산은 점점 수많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이자 재충전의 허파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 만큼 실상사 복원은 서해안 시대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제법성지 또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응할 수 있도록 성적지 매입 등 풀어야 할 과제에 좀 더 적극적인 교단적 관심과 대처방안이 요구되지만 현장에서는 늘 안타깝기만 하다.

실상사 복원은 우리에게도 퍽 고무적인 일이다. 성지와 가까운 이웃 사찰이기도 하지만 실상사 또한 소태산의 말씀과 자취가 어려 있는 소중한 성적지 영역이기 때문이다. 말을 듣지 않는 상좌승을 꾸짖는 두 노승에게 인장바위 예화를 통해 상좌승의 제도방법을 일러준 〈대종경〉 실시품 2장의 법문은 소태산이 실상사에 갔다가 설한 내용이다.

소태산이 봉래정사에 계시는 동안 실상사 주지는 한만허 선사였다. 만허선사는 월명암의 학명선사와 한 스승 밑에서 공부한 법형제로, 실상사는 두 선사와 소태산이 오가며 선문답을 주고받던 교류의 장이다.
▲ 변산 제법성지 입구.

노부부의 실지불공

소태산의 불교혁신은 신앙의 대상에서부터 과감하게 드러난다. 금산사에서 일원상을 그리며 진리의 상징을 구상한 소태산은 변산 시절 이를 더욱 구체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원상이 교강과 더불어 당시 교법으로 제정 발표 되지는 않았지만, 변산에서 초안된 〈조선불교 혁신론〉에 이미 등상불 신앙을 폐지하고 우주만물 허공법계를 다 부처로 모셔야 된다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사상이 나타나고 있음이다.

교의품 15장 불효하는 며느리에 대한 노부부의 실지불공 법문 역시 기존의 등상불 신앙에서 우주만물 허공법계를 다 부처로 보는 처처불상 신앙의 구체적인 실화요. 죄복의 직접 권능이 있는 당처불에 대한 실지불공의 실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법문은 원불교의 여러 예술적 장르, 즉 그림이나 문학, 성극 등의 모티브와 소재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친근하고 스토리텔링한 자료이기도 하다.

〈대종경〉 원문에는 불과 500여자로 내용이 함축되어 있지만, '설통 제일'인 공타원 조전권 종사의 설교 자료를 녹취하여 그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박용덕 교무의 꽤 맛깔스런 대화체 문장은(초기교단사 2권 94~97쪽) 마치 법문을 한편의 연극이나 드라마 장면으로 보는 듯 생생하다.

변산 근방에 박 주사라 불리는 노인이 살았다. 하루는 박주사가 실상사에 불공하러 가는데 석두거사가 이를 알아보고 물었다.

"노인장 어딜 가십니까?"
"우리 며느리가 어찌나 불순하게 하는지 실상사 절로 며느리 화해 불공하러 갑니다."
노인의 넋두리를 묵묵히 듣고 난 뒤 이윽고 거사가 물었다.
"그래 꼭 실상사 부처님만 부처로 알고 불공을 가면서 자기가 가장 가깝게 하고 있는 며느리 생부처님은 모르는가요?"

노부부는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다.

"생불이 어디 있소?"
"데리고 있는 며느리가 바로 생불이지요. 그러니 그 불공비용으로 며느리에게 해봐요"

지금도 봉래정사 길목에 서면 뜨락을 거닐던 소태산이 실상사를 향해서 재개재개 걸어오고 있는 노부부를 만나 인사를 건네며 그의 자초지종 얘기를 듣고 "그대 자부가 산부처이니 먼저 그 부처에게 불공하라"고 얘기하시는 모습이 생생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 변산의 산하.

격외설과 견성인가(見性印可)

수양차 은거 중에도 교법과 초기교서인 〈수양연구요론〉 등을 초안하고 제자들에게 주로 관심입정과 견성성불의 법을 설하며 석두거사로 지낸 변산 시절의 소태산의 삶은 어쩌면 그 자체가 바로 성리적(性理的)이었다 할 것이다.

당시 소태산은 불교의 선사들과 격외설을 논하며 많은 선화(禪話)와 성리법문을 남기게 된다. 성리품 18장 역시 봉래정사에서 백학명선사와 성리설을 즐기던 중 있었던 선화다.

소태산이 13세의 어린 제자 이청풍에게 몇 말씀 이른 뒤 봉래정사를 방문한 학명선사를 맞으며 "방아 찧고 있는 청풍이가 도가 익어간다"고 하자 학명선사 청풍에게 "발을 옮기지 말고 도를 일러오라" 하니 청풍이 서서 절굿대를 공중으로 쳐든다.

또 "벽에 걸린 달마를 걸려보라"고 하니 청풍이 일어나서 서너 걸음 걷자, 선사가 무릎을 치며 '십삼세각(十三歲覺)'이라고 견성을 허락하므로 이 광경을 본 소태산은 "견성하는 것이 말에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도 아니하나, 앞으로는 그런 방식을 가지고는 견성 인가를 내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소태산은 성리의 형상 없는 면, 즉 진리의 체(體)를 중심으로 한 격외설의 한계를 직시하고 경계한 것이다. 이는 격외의 논리를 부정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시대의 불법은 격외적 논리 초월만이 능사가 아니라 성리의 세계를 논리적으로도 능히 표현할 수 있어야한다는 얘기다.

한종만 교수는 저서 〈원불교 대종경 해의〉에서 이 부분을 "당시 변산의 제자들이 격외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성리연마를 체(體)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이 성리의 깊은 경지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성리의 용(用)까지도 밝히는 성리 연마가 되어야 하고 견성인가도 용까지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지금 제법성지는 온통 눈부신 초록빛이다. 법 생일 아흔 한 돌, 그 푸른 숲에서 선포한 원음의 향기가 이 산하에 다시 메아리쳐 온다.

변산 원광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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