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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으로 법회 보기 / 사요-지자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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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숙현 교무
  • 승인 2011.06.10
  • 호수 15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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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안할 수가 없다'
모시는 마음으로 배울 때, 밝음의 힘 생겨
▲ 광주전남교구 비아교당
스마트폰 시대가 저에게도 열렸습니다. 무슨 물건을 사면 오랫동안 간직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또는 불편해하는 그런 부류인데 말이지요. 우연한 기회에 스마트 폰을 구입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불편하고 복잡해서 도로 반환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스마트폰 세대가 되었으니 그 편리함을 최대한 잘 활용해 보고 싶었습니다. 안내책을 읽기 보다는 먼저 사용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빠를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니, 주로 20대, 젊은이, 심지어는 10대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배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물어보고 배우지 않을 수 없는 시대, 지자본위, 해야만 하는 시대가 아니라 안할 수가 없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주로 가르치는 입장에서만 서 있었으나 물질문명이 하루가 다르게 발달해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자니 지자본위에서 말한 과거 불합리한 차별제도(반상, 적서, 노소, 남녀, 종족)위주로 살았다가는 오히려 불편하고 손해보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밝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이익(스마트폰 경우처럼)에 대해서는 지자본위를 안할 수가 없게 되었지만 모든 일에 그렇게 배우려고 하는 그 정신의 세력을 확장시키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은 대소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어 있고 시비이해의 일로써 운전해 간다고 하셨는데 시비이해의 일로써 이 세상을 운전해 갈 때 바로 눈앞 한 치는 보이지만 대체로 생각이 단촉하고 마음이 편협한 경우가 많아 앞으로 오게 될 시비이해에는 더 밝고 넓게, 원만하게 바라 볼 수 있는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대산종사께서는 지자본위(智者本位)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진정으로 내 마음에 스승이 있는가 깊이 생각하여 보라. 나의 모든 것을 직접 고백할 스승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일생의 불행이며 영생을 통하여 불행한 사람이다. 사람은 백살이 되더라도 스승이 있어야 한다. 스승을 모실 때에도 한 분만 모시지 말고 되도록 많이 모셔야 한다. 스승이 없을 때에는 스승을 구하여 항상 모시고 배우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스승을 모시고 배우지 않을 때 어둠과 퇴보와 차별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식(知識)은 눈이요, 수족(手足)이며, 힘이며 영생의 등불이니 날마다 모르는 것을 배우고 살았는가, 배우지 않고 살았는가를 대조하여 배우기에 힘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스승이 없을 때에는 스승을 구하여 항상 모시고 배우고 살아가는 것이 복잡다단한 이 세상의 시비이해 속에서 영생의 밝은 등불을 켜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단촉하고 편협된 시각을 밝혀줄 모시는 마음이 그 어둔 눈을 뜨게 해주는 힘입니다. 모시는 마음으로 배울 때에 어둠과 퇴보, 차별이 물러가고 밝음의 힘이 생겨 영생의 앞날을 밝힐 수 있습니다.

잘 배우는 사람이 배운다고 생각은 하지만 잘∼ 배우고 있을까요? 지자본위를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일상수행의 요법 제7조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에서 쉽고 간단하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잘∼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배우려면 우선 자기의 눈을 가리고 있는 상(相)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대종경〉 변의품 19장에서 "아상(我相)이라 함은 모든 것을 자기 본위로만 생각하여 자기와 자기의 것만 좋다 하는 자존심을 이름이요, 인상(人相)이라 함은 만물 가운데 사람은 최령하니 다른 동물들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라 마음대로 하여도 상관 없다는 인간 본위에 국한됨을 이름이요, 중생상(衆生相)이라 함은 중생과 부처를 따로 구별하여 나 같은 중생이 무엇을 할 것이냐 하고 스스로 타락하여 향상이 없음을 이름이요, 수자상(壽者相)이라 함은 연령이나 연조나 지위가 높다는 유세로 시비는 가리지 않고 그것만 앞세우는 장노의 상을 이름이니…." 이처럼 금강경의 사상에 대하여 대종사님께서 쉽게 풀어주셨습니다.

잘 듣는다는 것은 수용적인 분위기에서 전적으로 듣는다는 말입니다. 복종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obedience(복종)란 말의 어원은 obedire라고 합니다. 그 뜻은 철저하게 듣는다는 것입니다. 유태전통에서는 복종이란 귀를 드러내놓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기 어떤 자물쇠도 귀마개도 없고, 거기 어떤 것으로부터의 유혹도 없다면, 단순히 귀만을 열어놓은 것이 아니라 가슴 또한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남의 말을 들을 때 또는 배울 때 전적으로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것은 내 생각과 딱 들어맞는다, 그러니 옳다, 이것은 그럴듯하지만 저것에 대해서는 믿을 수가 없어, 게다가 여자고 나보다 어리잖아' 들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분별성의 꼬리표를 매달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그 상(相)을 놓고 지금 여기에서 듣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잘 배우고 잘 듣는 사람은 깨친 분들입니다. 대종사께서 보여주신 언행도 그 본보기가 됩니다.

〈대종경〉 실시품 31장에서 이 운외(李雲外)의 병이 위중하매 그의 집안 사람이 급히 달려와 대종사께 방책을 문의하는지라, 말씀하시기를 "곧 의사를 청하여 치료하라" 하시고, 얼마 후에 병이 평복되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전에 운외가 병이 중하매 나에게 먼저 방침을 물은 것은 그 길이 약간 어긋난 일이니라. 나는 원래 도덕을 알아서 그대들의 마음 병을 치료해주는 선생이요, 육신 병의 치료는 각각 거기에 전문하는 의사가 있나니, 앞으로는 마음병 치료는 나에게 문의할지라도, 육신병 치료는 의사에게 문의하라. 그것이 그 길을 옳게 아는 것이니라"하셨습니다. 모든 일(솔성의 도, 인사의 덕행, 모든 정사(政事), 생활에 대한 지식, 학문과 기술, 모든 상식)에 해당하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차별있게 할 것이 아니라 구하는 때에 있어서 하자는 것은 지자본위를 그대로 실천하는 면을 보이신 것입니다. 잘 배우는 사람은 깨친 사람입니다. 깨쳤을 때만이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잘 배우기 싫은 경계를 대할 때마다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는 것이 정진이고 적공이며 깨침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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