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후반전, 영화보며 재미·즐거움·행복 충전

▲ 김은주(가운데) 대표와 자원봉사자 어르신.
▲ 2시30분에 상영하는 영화관람을 위해 입장하는 어르신들(왼쪽).
▲ 영화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어르신들.
지하철 5호선 종로3가 역. 5번 출구를 나선 순간 만나는 사람은 어르신이 태반이다.
인근 탑골공원과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어르신들만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낙원상가 4층에 위치한 허리우드극장은 3년 전 추억을 파는 실버영화관으로 새 단장했다.

365일 영화 관람료 2천원

오후 2시.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아 3회 영화를 기다리는 어르신. TV방영(kbs 다큐 3일)을 통해 알게 됐다는 노부부는 "종로에 사는데 모르고 있었어. 걸어서 올 수 있는 거리인데 말이야"하며 "젊었을 적에 영화 봤지. 늙어서는 통 보질 못했다"고 말했다. 요즘 영화관은 신세대들의 구미에 맞게 운영되다 보니 80세 이상 어르신들이 가기엔 영 어색하다는 평이다.

허리우드클래식 김은주(38)대표는 "특이하게도 이곳은 젊은이들의 비율보다 어르신들 비율이 높다"며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영화관 보다는 어르신들을 위한 영화관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소개했다.

김 대표는 처음 영화관을 인수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최신영화를 상영했다. 그러나 어르신들은 호응이 없었다. 혹 관람한 어르신들도 "이런게 영화냐"며 상영도중 자거나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불평만 늘어놓았다.

김 대표는 고민 끝에 추억의 영화를 상영했다. 어르신들은 "죽기 전에 이런 영화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이후 김 대표는 추억의 영화를 상영했다. 55세 이상 어르신들은 365일 관람료 2천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추억의 음악다방도 마련했다. LP판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여름에는 매실차를 겨울에는 국화빵을 맛볼 수 있다.

'정'과 함께 어르신들과 소통

매주 금요일엔 새로운 영화로 교체된다. '해저 2만리', '두 여인'에 이어 이번 주는 '킬리만자로의 눈'을 상영한다. 8월5일 첫 금요일엔 강수연, 이대근 주연의 '감자'를 상영한다.

김 대표는 "매일 오는 어르신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부담 없는 가격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매일 보면 어제와 다른 장면이 눈에 들어와 재미있기 때문이다"는 감상을 전했다. 그날의 기분 따라 새로운 장면이 매일 보인다는 것이다.

매표소엔 매일 어르신들이 '정(情)'으로 주는 간식이 쌓이기도 한다. 떡, 사과, 누룽지 맛탕 등 심지어 반찬과 연밥을 해오는 어르신도 있다. 김 대표는 "참 행복하다"며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돈암동에서 왔다"는 어르신에게 연세를 묻자 "82세 동갑내기다"며 "영화를 좋아해서 나란히 오게 됐다. 최근 상영한 영화는 다 봤다. 가끔 이곳에 오면 동년배들이 많아 좋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 손을 잡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손자가 방학 중이라 같이 왔다"는 홍유연(84) 할머니는 "영화관람 한다는 자체가 좋다. 손녀는 친 할머니를 모시고 오는 중이다"고 소개했다. 홍 할머니의 기억에 남는 영화는 '빨간 마후라', '아씨' 등이다.

그는 "늙어도 죽지 않고 살다보니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는 날도 있다"며 "이제는 살만큼 살아서 언제 죽어도 안 섭섭하다. 자식들에게도 효도를 받을 만큼 받은 셈이다. 지금까지 속 썩이는 자식이 없어 행복하다"는 소감을 말했다. 홍 할머니의 손자는 "이런 공간이 있어 좋다"며 "어르신들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복지관이나 노인정 이외의 문화공간이 어르신들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송파구에서 왔다는 78세 어르신은 "옛날에는 일하느라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는 즐겁고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한다"며 "영화관 단골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일생을 뒤돌아 보면 재미없게 산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인생 후반전이라 섭섭한 마음도 있다. 그런만큼 더 행복하게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한다"며 "자녀들이 기대에 못 미쳐도 '그러려니'하고 마음을 넉넉하게 가진다. 그러다 일생 마감할 때 되면 '안녕'하고 가야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데 어떡하겠냐"는 여운을 남기며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이런 어르신들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김 대표는 여유가 있다면 "영화상영 후 포스터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틀에 박힌 어르신들의 영정 사진보다는 영화 포스터와 함께 활짝 웃는 사진, 즐거움을 찍어 주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다. 이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김 대표는 국내 모 전자 회사에 후원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낼 계획이라고.
▲ 영화표를 구입하는 어르신들.
▲ 추억다방에서 음악을 듣는 어르신들(오른쪽)과 장민욱 DJ.

초고령사회의 소비문화 만들어야

김 대표는 "어르신들이 이곳에 오기위한 모든 작용은 건강으로 결부 된다"며 "친구와 약속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골라 입는 모든 과정이 참으로 큰 변화를 가진다"고 말했다. 그만큼 노년의 문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활성화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란 말을 좋아한다. 김 대표는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세계에 알려졌지만 그 이전에 동방예의지국이란 이미지도 있다"며 "정(情)과 효(孝)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들만의 정서이다"고 강조했다. 초고령사회에서 '정과 효'를 주제로 한 콘텐츠만 있다면 문제없다는 의미이다. 또 어르신들에게 맞는 합리적인 소비형태를 만든다면 우리나라의 노인 자살이나, 우울증 등 크고 작은 문제를 극복 해 낼 수 있는 방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70~90대 어르신들은 우리나라를 이만큼 잘살 수 있게 만들어준 주인공이다"며 "이렇게 방치하면 안된다"고 소리 높였다. 정부나 기업에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준 어르신들을 '나 몰라라'하고 내 버려두면 안된다는 목소리다. 건전한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대표가 돈이 많아 실버영화관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월급날이 되면 그는 '피가 마른다'는 표현을 했다. 그는 "3년 동안 월급 한 번 제대로 가져가 본 적 없다"며 "돈 벌기보다는 진정성을 위해, 초고령 사회를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2시30분. 오늘의 마지막 3회 영화가 시작됐다. 실버영화관 로비는 조용하다. 음악다방에도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장민욱 DJ가 음악 감상을 하며 또 다른 어르신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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