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영광군 백수면 출생인 삼산(三山) 김기천(金幾千) 종사는 교조 소태산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중 한 분이고, 교단사상 최초로 견성인가를 받은 제자입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그는 원불교 창립을 위해 한 생애를 초지일관 살다 간 선구자요 선각자요 공로자이지만, 동시에 문학가로서도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종교문학을 논하고 원불교문학을 말하는 자리에서라면, 삼산은 응당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인물입니다.

훤칠한 키에 시원하게 벗겨진 이마, 그리고 안경 속에 형형한 눈과 짙은 눈썹, 당당한 콧날과 풍부한 콧수염까지 이국적 마스크를 지닌 이 양반은 시쳇말로 완소남의 조건을 고루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7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여 13세엔 한문의 문리를 터득하고 한시를 짓기 시작합니다. 시골 글방이지만 17세에 훈장이 되어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논밭에 임야까지 자기 땅도 있어서 먹고살기 궁색하지 않기에, 틈틈이 한학에 정진하며 여가엔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시를 읊습니다. 아내와 딸 둘. 아들 없는 것 한 가지 빼고는 그다지 아쉬울 것 없이 나름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27세 되던 1916년(원기1년), 같은 면에 사는 팔산 김광선의 안내로 한 살 아래 대종사를 만나서 그의 제자가 됩니다. 이로부터 조용하던 그의 생애에는 시련이 닥칩니다. 크나큰 전환점을 맞이한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말입니다.

삼산문학의 배경은 소태산과 견줄 여지가 많습니다. 시대적·지리적 배경이 같은 데다 농가 출신에, 부친을 비교적 일찍 여의고 가장의 책임을 맡게 된 것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소태산이 글공부에 재미를 못 붙이고 서당을 스스로 멀리 한 것과는 달리 삼산은 학문을 대단히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산의 문학배경은 소태산과 정산의 중간적 성격이 없지 않습니다.

삼산은, 꽃이 화려함에 비해 열매가 시원찮은 홍도화를 보고 쓴 글 <꽃이 너무 황홀하면> 가운데서 '花繁猶輕實 語多易失中'(꽃이 많으면 오히려 열매가 가볍고, 말이 많으면 중도를 잃기 쉽다)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의 언어관 내지 문학관이 잘 드러난 듯합니다.

그의 문학은, 문자에 끌리지도 말고 언어에 팔리지도 말라는 선불교적 가르침과, 한·당·송의 화려한 문사(文辭)가 보내는 유혹의 틈새에서 중도적 절충을 꾀한 듯합니다.

1935년 46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부산 하단지부에서 열반하기까지 월말통신, 회보 등 교단지에 작품발표를 활발히 하였습니다. 유고까지 합하여 문학유산은 수필 8편, 가사 6편, 한시 2수, 창가 7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별도로〈철자집〉한 권이 있습니다. 철자집은 4자성어 1500자쯤 되는 한문교과서 겸 교리학습서로 〈천자문〉과 같은 운문 체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한시(4언 고시)로 분류할 만합니다. 삼산으로서는 굳이 한시를 의도한 것은 아닌 듯하지만, 우리가 지금 천자문을 한시로 분류하는 것이 대세일진대 철자집도 한시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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