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부법을 알고보니 천진묘성이 보름달과 같고 미묘한 광명이 피어나니 밝기가 일월에 넘치도다"

▲ 대타원 이인의화.
▲ '오도가(悟道歌)'전문.
대타원 이인의화 선진의 시가인 '오도가'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자료다. 고 항산 김인철 원정사가 원기63년(무오년) 잠시 휴식차 변산교당에 들러 친필 한글 서체로써 김정근 교무에게 건낸 것이다. 항산 원정사는 김 교무에게 "이 '오도가'는 아주 좋은 글이니 잘 연마해 보라"고 했다. 이에따라 김 교무는 최근까지 벽에 붙여놓고 공부해 오던 중 항산 원정사의 열반 후 필자에게 전해졌다. 자신성업봉찬 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아 소개한다.

대타원 이인의화(大陀圓 李仁義華 1879-1963)는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 대산종사 세 어른으로부터 깨달음의 경지를 인증받은 보기 드믄 걸출한 재가 선진이다. 대타원의 생애를 조명해 보면 더욱 존경과 공경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전주태생으로 8세 때에 칼로 옷고름을 뜯다가 잘못하여 왼쪽 눈을 찔러 볼 수 없게 되었다.

16세 때에 결혼하였으나 남편과 일찍 사별하는 등 온갖 세파를 겪었으며, 익산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여관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렇게 강한 의지로 주어진 운명을 이겨내는 중에 자신의 처지에 대한 종교적 회의(懷疑)가 일어났다. 세간 생활에 대한 허무감을 느끼고 초인(超人)의 생활을 동경하기도 했다.

기도생활을 해 보기도 하고, 바른 공부길을 찾고자 방황하던 중, 경타원(慶陀圓) 최수인화(崔修仁華, 1889~1980)교도의 연원으로 원기20년(1935) 7월, 54세 때에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였다. 정법회상을 갈망하던 그는 새 부처님 소태산대종사에 대한 신심과 교단에 대한 공심(公心)이 특출하였고, 수행에도 대 정진(精進)이 있었다.

대타원은 소태산대종사의 법문 중 생활속의 삼학공부 즉, '무슨 일을 당하고 행할 때마다 일심으로 멈추고 생각하고 연마하여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린다'는 법문을 깊이 새기고 생활속에서 그대로 실행하여 그의 공부력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었다.

오도가(悟道歌)

'슬프도다. 중생들이여 크고 좋은 집을 두고 찾을 줄을 모르고 고해에서 헤매며 입으로는 극락을 부르며 견성을 원하나 마음으로는 지옥 갈 짓을 행하니 어찌 불쌍하고 가련하지 아니하랴.

견성이라 하는 것은 찾고자 하는 집안에 있는 것인데 어찌 다른데서 구하리요. 공부하는 사람이 그 집을 찾는 것은 일대 사명인바 그 집을 찾아 아는 것은 견성이요, 그집을 잘 수호한 것은 양성이요, 그 집을 잘 사용하는 것은 솔성이니라.

또 아는 방법은 하나로부터 천만에 이르니 그 진리가 무궁하고 수호하는 방법은 한때로부터 만겁을 연하니 그 정력이 무궁하고 사용하는 방법은 한 일로부터 천만의 일이니 그 길이 또한 무궁하도다.

그 집 도면을 보면 일원상이요, 그 집 이름은 영보도국이라. 그 집을 찾아 들어가면 첫째 원만보신불이 계시고 둘째는 청정법신불이 계시고 셋째는 화신불이 있어 천백억화신을 나투도다.

이 공부법을 알고보니 천진묘성이 보름달과 같고 미묘한 광명이 피어나니 밝기가 일월에 넘치도다.'

'오도가'의 문장은 평이하고 간결하나 '견성'의 정의와 필요성과 방법, 그리고 견성의 경지를 밝히고 나아가 이를 양성과 솔성으로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대타원이 말하는 견성의 경지는 이미 일원의 체성에 합일한 큰 깨달음의 경지임을 전체적인 내용과 결어에서 "이 공부법을 알고보니 천진묘성이 보름달과 같고 미묘한 광명이 피어나니 밝기가 일월에 넘치도다"에서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오도가'는 대타원의 공부가 원숙한 경지에 이른 말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대타원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일심정성을 다해 대발심 대신성 대정진이 있었는가는 소태산대종사와의 문답감정법문인 〈대종경〉교의품 27장에서 잘 찾아 볼 수 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이인의화(李仁義華)가 지금 큰 발심이 나서 영업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예회를 본다 선원에 참예한다 하여 그 신성이 대단하므로 상을 주는 대신에 이 시간을 인의화에게 허락하노니 물을 일이 있거든 물어보라" 인의화 여쭙기를 "어떤 사람이 너희 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원래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되는 이치를 스스로 깨쳐 알게 하는 교이니 그 이치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면 될 것이요, 그 이치를 알고 보면 불생 불멸의 이치와 인과 보응의 이치까지도 다 해결되나니라" 또 여쭙기를 "그 이치를 안 후에는 어떻게 공부를 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경계를 대하여 요란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게 하나니라."

이 법문에서 볼 수 있듯이 대종사는 대타원의 대신성과 대발심, 대정진심을 높이 평가하심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대타원의 공부경지를 이미 알고 계셨으므로 특별히 "물을 일이 있거든 물어보라"하신 후 마음공부의 핵심을 교시하셨으며, 나아가 큰 깨달음을 얻은 이후 거쳐야 할'보임공부'의 표준으로 "마음이 경계를 대하여 요란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게 하나니라"라고 답하신 것이다.

이 때 이미 대타원은 견성의 단계를 넘어 양성과 솔성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대종경〉성리품 23장의 "…과거에는 인지가 어두운 고로 견성만 하면 곧 도인이라 하였지마는 돌아오는 세상에는 견성만으로는 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며 거개의 수도인들이 견성만은 일찌기 가정에서 쉽게 마치고 성불을 하기 위하여 큰 스승을 찾아 다니며 공을 들이리라" 라고 하신 법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대타원은 세상의 풍파를 거치면서 오히려 일심공부가 되었고, 대종사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받들자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듯이' 법열에 젖으면서 신·분·의·성을 다하여 견성에 이르는 대정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타원의 이러한 공부과정은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대타원 이인의화님은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께서 공부가 깊다고 인증하셨으나 일방에 능하므로 체성에 합일한 스승님을 찾아다니며 더욱 법받으며 공부하였다"고 하신 말씀에서 대타원이 큰 깨달음을 얻은 이후 더욱 원만구족하도록 쉼없는 대 적공과 정진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원광〉2호에 대종사님의 말씀에 따른 동산선원 부지확보에 대한 일화가 실려있으며 현재의 동산선원, 이리교당, 동이리교당 등이 이뤄진 것은 대타원의 원력(願力)에 힘입은 바가 크다. 대타원은 원기48년(1963) 3월11일 동산선원에서 85세로 열반하였으며 공부성적은 정식법강항마위, 원성적 정1등이다.

원기76년 3월 제11회 수위단회에서는 대종사 탄생100주년 성업봉찬 기념대회를 맞아 법위를 출가위로 추존하고 종사회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 했다. 그는 불구와 세파를 이겨낸 걸출한 재가교도로 신심·공심·수행심과 사업, 후진 육성에 대한 정성에 이르기까지 재가 출가의 사표가 될 수 있는 분이라 본다.

대타원은 경진동선(원기25년,1940) 이후에는 살림을 며느리에게 맡기고 전문 입선 했으며 특히 정산종사와 법담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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