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소태산대종사 봉래정사 시절에 시봉진의 실경사진.(원기13년 1회 기념총회시 재연 촬영)
▲ 소태산대종사 변산에 입산하여 임시거처로 머물던 월명암.
소태산대종사는 간석지 방조제공사가 준공될 무렵인 원기3년(1919) 봄, 영광경찰서에 연행되어 1주일 만에 풀려난 뒤 변산에 있는 월명암으로 갔다. 주지인 백학명 선사와 지기가 상통하여 10여 일간 머문 뒤 후일을 기약하고 돌아왔다.

영산으로 돌아온 소태산대종사는 방언공사를 마무리하고, 법인성사를 이룬 후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고 금산사에서 휴양을 하다 돌아왔다. 2백여 리 거리의 변산을 관(觀)한 후에 말했다.

"내가 어느 날 아침, 영광에서 부안 변산 쪽을 바라보니 허공중천에 맑은 기운이 어리어 있는지라, 그 후 그곳에 가보았더니 월명암에 수도 대중이 모여들어 선을 시작하였더라<후략>."

영산에서 음력 10월6일 법인기도를 해제하고 10월20일(양력 12.12) 변산으로 출발하여 걸어서 다음날 월명암에 도착했다.

근 석달 보름만에 소태산대종사를 만난 정산종사는 환희용약하였고, 학명스님 또한 반가이 영접하여 서로 불교의 혁신사상을 토론한 결과 공감되는 바가 많은지라 그 교의가 각별했다.

소태산대종사의 변산 입산은, 다년간 복잡하던 정신을 휴양하며, 회상 창립의 교리 제도를 초안하고, 사방 인연을 연락하여 회상 공개를 준비하며, 험난한 시국에 중인의 지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영산에서 법인기도를 해제하였으나 정산종사는 월명암에 있어 법인기도 해제에 동참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월명암 옆 쌍선봉에서 소태산대종사는 정산종사, 오창건과 함께 10월26일(양력 12.18)에 다시 해제식을 했다.

소태산대종사가 월명암에 머물자 찾아 온 제자들이 민망히 여겨 따로 집을 마련하여 시봉할 것을 간청하는 중 송적벽과 김남천이 더욱 간청하여 원기4년 음력 12월에 산 아래 실상사 옆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남천이 홀로 된 그의 딸 김혜월과 외손녀 이청풍으로 하여금 소태산대종사를 시봉토록 했다.

소태산대종사가 실상초당에 거주하면서 수양에 전력하자, 영광, 원평, 전주 등지에서 거주하는 제자들이 은연중에 서로 소식을 통하여 방문했다.

가까이 시봉하는 제자들은 낮에는 산전을 개척하며 생활의 자료를 삼고, 밤이 되면 법석에 참례하여 청법 낙도했다. 이때 법설의 요지는 대개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방법을 많이 설했다.

원기5년 음력 3월에 소태산대종사는 장편 가사인 '회성곡(回性曲)'을 '회성곡''교훈편''안심곡' 3편으로 나누어 지었다.

이어 음 4월에 정식으로 교강(敎綱)을 발표했다. 교리의 강령은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이다. 사은은 천지·부모·동포·법률의 피은·보은·배은을 말한 것이요, 사요는 남녀권리동일·지우차별·무자녀자타자녀교양·공도헌신자이부사지이다. 소태산대종사는 이 사은사요를 인생에 있어서 마땅히 행할 도로서 세상을 구할 요법이라 했다.

삼강령은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로 공부인이 마땅히 밟을 도로서 인류를 제도하는 요법이다. 팔조목은 신·분·의·성 4조로서 진행력을 삼고, 불신·탐욕·나·우로써 없애야 할 건수로 잡아 삼강령을 추진하는 요법이 되게 했다.

이후 모든 제자들에 대하여 교화 방식이 먼저 이 교강의 이해로써 공부에 주력을 삼도록 했다.
교강을 제정한 후 소태산대종사는 밖으로 승려들과 교제하여 사원의 모든 법도를 일일이 묻고 연구한 〈조선불교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과 수양과 연구의 요긴한 길을 밝힌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을 초안해 익산총부 건설 후 책자로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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