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원광정보예술고등학교
하늘에 무슨 슬픈 일이 일어났기에 여름 내내 눈물을 그렇게 많이 흘렸을까.
전국을 순회한 눈물의 세레모니는 세상사에 놀라움과 엄청난 슬픔의 눈물을 안겨주고 이제야 파란 하늘로 진정이 되는 것 같다.

울어야 할 시기에 울지 못한 매미들이 급기야는 식당을 습격해 울어대는 바람에 휴업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해외 토픽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었던 여름날의 일기였다.

안타깝게도 여름이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 채 가을날에 밀려가는 시기가 도래했다.
성장을 멈춰버린 지나간 여름 체취를 더듬어 보다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치고는 무척 어려웠던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형평성과 실효성 자체에도 허구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그 시절 춥고 배고프고 가난과 실의에 빠져 있었던 국민들의 의식 구조에 노력하면 보상이 따른다는 가능성을 심어 주고싶었던 교육의 기준인 것 같다.

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아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 위한 교육의 목표점이었다면 그 시대 상황으로 이해하고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강산이 몇 차례 바뀔 시간이 지나간 21세기의 기준점으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의 결과를 재조명 해 본다.

토끼는 그냥 잠을 잤고 거북이는 꾸준하게 쉬지 않고 엉금엉금 기어갔기에 승리했다고 생각을 단순 고정화시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대한 사고의 멈춤이라서 동의하고 싶지 않다.

다양성의 시대에 다양한 사고력을 피력할 수 있지만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토끼는 거북이를 보았고 거북이는 목표점인 깃발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거북이가 승리했다고, 다시 말하면 토끼의 목표점은 엉금엉금 기어가는 수준의 거북이었고 거북이의 목표점은 재빠르게 뛰어가는 토끼가 아니라 결승점인 깃발에 있었다는 것이다.

목표점이 달랐기에 결과도 다르게 나왔다고 생각한다.

27년간 교사를 천직으로 삼고 오늘도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학생들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며 직(職)이 아닌 업(業)에 총력을 기울이며 사명감으로 교사일지를 이어오고 있다.

어린 날 학교에 첫 발을 딛고 첫 번째 배웠던 내용을 되새김하여 거론하는 것은 그것이 던져주는 시사점이 너무도 커다랗게 클로즈업 되어오기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토끼는 영민하다. 다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토끼처럼 영민하고 풍요롭게 보여지던 학생들이 그 상징성처럼 크게 성장하지 못하고 평범함으로 학교생활이 마무리 되는 것을 많이 경험했기에 지나간 시간이 더더욱 안타깝고 아쉽게 느껴진다.

거북이는 느리다. 장수의 표상이다. 거북이 같은 조건으로 성장 가능성이 부족했던 제자들이 꾸준한 노력과 집념으로 목표를 향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준 적이 있다.

그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실력 이상을 발휘하여 사회에 훌륭한 발자국을 남겨준 사실적 상황 또한 머리와 가슴 속에 앨범처럼 간직해 두고 있어서 흐뭇하고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목표는 뇌를 움직이고 웃음은 얼굴을 움직인다'고 했다.

재능만 믿고 자만에 빠져 가벼운 목표점에 만족해하는 토끼가 되지 말고 부족하지만 숨쉬는 것처럼 쉬지 않고 꾸준히 자신을 연마하여 큰 목표점을 향해 가는 거북이와 같은 사랑하는 학생들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토끼의 해인 신묘년에 토끼의 장점과 거북이의 꾸준함을 융합해 시대의 등대지기가 될 원창학원의 학생들에게 다시금 사랑의 파이팅을 팍팍 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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