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칠타원 정세월 선진.
▲ 원기6년 제자들과 실상초당 위에 새로 건축한 석두암(원기28년 촬영).
소태산대종사는 봉래정사에서 수양하며 회상을 펼 준비로 교리와 제도를 준비하고 인재들을 만날 때, 모르는 사람들은 한가히 노니는 줄로만 알았다.
의기있는 청년들이 간혹 찾아와 독립운동 할 것을 권하며 말했다.

"진리를 깨달으신 큰 도인이시라면 세상에 나가 구국을 위하여 싸움을 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별 인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태산대종사는 웃으시며 청년들에게 말했다.
"태평양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몽둥이로 때려서 몇 마리나 잡을 것이며, 얼마나 큰일을 하겠느냐. 태평양 고기를 잡으려면 먼저 큰 그물을 장만해야지. 그와 같이 나는 천하를 구원할 그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원기8년 서중안은 친형 서동풍으로 부터 소태산대종사의 도덕 법문을 전해 듣고 감동된 바 있어, 형님의 안내로 그해 7월14일(음력 6.1), 봉래정사 석두암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뵙게 되었다.

서중안은 소태산대종사께 감복하여 그 자리에서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으며 하룻밤을 지내고 난 뒤에는 그것도 부족하다하여 10세나 손아래인 소태산대종사께 지중한 영부(靈父)인 부자지의(父子之義)로 결연하여 주기를 간청했다. 그리고 자기 심신의 일체 지도권을 일임했다.

서중안은 소태산대종사와 부자지의를 맺고 김제 집으로 돌아온 후 원기8년 8월7일(음력 6.25) 부인 정세월과 함께 봉래정사로 이른 아침 출발했다.

변산 초입인 보안면 종곡 이춘풍의 집에 당도하여 늦은 점심을 먹고 봉래정사에 저녁 늦게 도착했다. 서중안만 소태산대종사가 계시는 석두암으로 올라가고 정세월은 다음날 아침, 석두암에 올라갔다. 소태산대종사가 기다렸단 듯이 반기며 말했다.

"내가 어제 영광에 갈려고 했더니 아침에 하도 좋은 기운이 둥둥 뜨길래, 대체 어떤 사람이 오려고 좋은 기운이 뜨는지 모르겠다 했더니, 쪼깐 사람 오려고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가!"

그리고 웃으며 마루의 봇짐을 가리키며 "내가 이렇게 보따리를 싸놓았는데 안 가고 시방 있습니다"라고 물었다.

"어떠한 말을 듣고 이러한 험로에 들어왔습니까?"
"선생님의 높으신 도덕을 듣고 일차 뵈러 왔습니다."
"이제 나를 보았으니 무슨 원하는 것이 없습니까?"
"저는 항상 근심걱정이 많아 갈팡질팡하여 마음을 바로잡기가 원입니다."

"마음 바로잡는 방법은 먼저 마음의 근본을 깨치고 그 쓰는 곳에 편벽됨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을 알고자 하거든 성리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소태산대종사는 정세월에게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 써주며 연마하도록 했다.

서중안이 소태산대종사에게 청했다.
"이곳은 도로가 험난하고 장소가 협착합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장소가 광활한 곳을 택하여 도량을 정하시고 여러 사람의 전도를 널리 인도하심이 시대의 급선무일까 합니다."

중안이 거듭 말했다.

"현금 천하가 도덕이 미약하고 인도정의가 피폐하여 약육강식과 잔인패행 (殘忍悖行)을 무소불위(無所不爲)하는 말로참경(末路慘景)에 이르렀습니다. 사부주께옵서는 무량하신 도덕으로 일체생령을 자비롭게 보시어 제도하여 주십시오."

소태산대종사는 때가 온 것을 짐작하고 그의 심경을 떠보았다.
"내가 세상에 나가기는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가 능히 이 일을 감당하겠는가?"
"소자(小子) 비록 물질이 많지 않고 정성이 부족하나 능히 담당하겠습니다."

소태산대종사는 드디어 하산할 것을 허락하고 서중안과 더불어 장차 회문(會門)을 열 계획을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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