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태산의 전설을 간직한 곰소항. 현대화 되어 옛 정취는 없다.

곰소, 그 전설의 길

제법 칼칼해진 바람결에 가을이 깊어 가고, 변산은 지금 가는 곳 마다 삼색이 어우러진 코스모스와 하얀 구절초, 그리고 햇빛과 몸을 섞으며 눈부시게 흔들리는 억새꽃이 한창이다. 내변산에서 바디재를 넘어 반계선생의 유적지인 우반동 마을을 지나 곰소로 향한다.

오늘 이 길은 잘 포장된 도로를 자동차로 달리고 있지만, 90년 전 소태산의 여정은 손수 삼은 짚신을 신고 꼬불꼬불한 비포장 오솔길을 돌부리에 채이며 내쳐 걸어 곰소에 닿았을 것이다.

'곰소' 라는 지명은 거꾸로 부르면 '소곰'이 된다. 옛날에 할머니들이 소금을 "소곰 소곰" 하던 기억이 난다. 그랬다. '곰소'는 심마니들이 사용하던 은어로, '소금'을 일컫는 말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이는 곧 곰소가 천일염의 생산지인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곰소에 들어서자 짭짜름하고 비릿한 젓갈 냄새가 코를 찌른다. 온통 젓갈집이 즐비한 시장 골목은 김장철이 머지않아서인지 벌써부터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최근 새만금 시대가 열리면서 천일염 생산과 각종 젓갈시장이 활발하게 형성되고 있는 곰소는 서해안의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소태산의 변산 노정에서 중간 경유지인 곰소는 소태산의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특히 "곰소의 소복여인"은 그 주인공이 법성포에서 큰 여관과 음식점을 하던 나씨 부인으로, 생전에 소태산의 인품에 감복하여 공양도 올리며 흠모한 바 있는 여인이다. 그가 얼굴은 미색이나 남을 농락하고 재물을 빼앗는 등 많은 죄를 지어 죽어서 금사망보를 받았다.

어느 달 밝은 가을 저녁이었다. 일산 선진이 대종사를 모시고 봉래정사로 가던 중 날이 저물어 곰소 여막에 하룻밤 묵고 있는데 웬 소복여인이 나타나 구슬프게 울었다. 소태산은 종이에 붓으로 글씨를 몇 자 적어 여인에게 주며 속히 떠나 목적지에 가서 펴보라고 했다. 여인이 나간 뒤 그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앞 논두렁사이로 금사망보의 큰 짐승이 물결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목적지에 가서 수문에 머리를 찧고 죽어 그 몸을 벗고 제도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또 봉래정사에서 모친 환후 급보를 받고 일산과 팔산을 대동하고 곰소까지 바삐 걸었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갈 길이 급하자 바다를 막대기로 치니 바닷물이 갈라졌다는 얘기며, 심원에서 곰소로 건너가는 나룻배를 기다리다 배는 안 오고 날이 저물자 스승은 제자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발부리만 딛고 따라오라" 이르고 앞장서서 바닷물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바닷물이 갈라져 '신작로'가 되어 무사히 건너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들은 구전되어 오는 동안 어느 정도 픽션이 가미 됐을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이 보여준 이적과 신통의 일화는 꽤 많다. 아마도 회상 초기에 부득이 필요한 방편이었을 터다. 하지만 후일 소태산은 이적이나 신통에 대해서 "성현의 말변지사"라 내려치며 거기에 현혹되지 않도록 당부한다. 그렇지만 곰소에 어린 전설 같은 이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소태산이 오고 가던 그 바다와 그 길의 풍경을 더듬어 가며 행간에 담긴 교훈을 새겨본다.
▲ 보안면 신복리 종곡마을 이춘풍 사가터로 추정되는 곳에 새로 지어진 주택.

종곡마을 이춘풍가

'봉래산인'이라는 자호로 <산중풍경>을 지어 당시의 변산 풍경을 생생하게 기록한 경상도 김천 선비 훈산 이춘풍은 사도에 빠져 전라도 영광으로 이사 간 고모댁(정산종사 집안)을 모셔가기 위해 영광으로 갔다가 정산의 부친인 송벽조의 안내로 변산에 계신 소태산을 뵙고 제자가 되었다.

그 뒤 고향의 가산을 정리하고 원기6년 음력 섣달에 가족들을 데리고 보안면 신복리 종곡마을(변산으로 들어오는 초입)로 이사 온다. 이후 이춘풍 사가는 봉래정사를 오가는 소태산과 그 제자들이 하룻밤 묵는 숙소요 쉼터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이곳은 훈산의 두 딸인 항타원 이경순과 달타원 이정화선 진이 어린 시절 간간이 들르시던 소태산 할아버지(이춘풍은 나이가 연상이나 대종사를 사부라 불렀음)와 성리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훈증과 귀여움을 받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소태산의 발길이 머물고 선진들의 이야기가 담긴 종곡 이춘풍가는 지금 옛 자취를 찾을 길 없다. 새 집과 새 주인으로 바뀐 지 오래다. 집주인이 낡은 초가집 사진을 보여준다. 그는 처음 그 집에서 조금 살다가 형편이 나아져 새 집을 지었다며 집터가 좋은지 자식들도 잘되고 생활도 넉넉해졌다고 자랑이다. 어쩌면 그 사진 속의 낡은 초가집이 이춘풍가는 아닌지 짐작될 뿐 확인할 길은 없다.

교단에서는 그 집을 매입하려고 애썼지만 주인이 팔지 않자, 몇 년 전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 옆집을 매입하여 놓았다. 그러나 현재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는 형편이다.

언젠가는 이곳에 이춘풍가가 복원되어 스승님들이 오가며 머물던 것처럼 변산성지순례의 아름다운 쉼터가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경순, 정화 두 어린 자매가 소태산 할아버지와 도란도란 얘기하던 그 정경을 떠올리며…

종곡부락을 에워싼 황금들녘을 스치는 갯바람 속에는 방금 곰소나루를 건너온 그 분의 향기가 아직도 배어있다.

줄포 장 구경

대종사 영산에서 봉래정사에 돌아오사 여러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는 도중에 어느 장 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아침에 옹기장수는 옹기 한 짐을 지고 장에 오며, 또 어떤 사람은 지게만 지고 오더니, 그들이 돌아갈 때에는 옹기장수는 다 팔고 지게만 지고 가며, 지게만 지고 온 사람은 옹기를 사서 지고 가는데 두 사람이 다 만족한 기색이 엿보이더라…

〈대종경〉 교단품 22장은 바로 줄포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태산의 변산 노정은 뱃길이 끊기면 육로로 흥덕·줄포를 경유하여 내변산에 이르게 된다.

당시 줄포는 군산항과 더불어 양대 항구로 발전하고 있던 만큼 장도 꽤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태산은 종종 경유지인 줄포의 장 구경을 하며 민초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시대의 동향을 살폈을 것이다.

또한 당시 봉래정사에서 소태산을 시봉하던 오창건, 김남천, 문정규 등도 줄포장에 나와 양식이며 생필품을 구하여 지게에 지고 갔다 한다.

이러한 줄포가 지금은 아주 작은 시골로 변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무렵까지 일제가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 가는 통로였던 줄포항은 치과병원과 은행이 있을 만큼 번성했으나 갯뻘이 메워져 수심이 낮아지자 폐항이 됐고, 그 영화를 곰소항에 넘겨주며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아직도 1일과 6일로 줄포 장이 서기는 하지만 이제 그 장에 옹기장수며 시끌벅적한 장꾼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윗집 할머니는 그곳에 가서 튀밥을 튀고 기름을 짜온다. 쇠락한 그 장에서도 여전히 민초들은 상부상조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 가을 변산.


<변산 원광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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