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암각에서 딸 만나며 보고픔 승화 한다오"

▲ 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유품들.
"자꾸 남의 삶을 기웃거리는 거. 내 마음의 허기가 물욕을 부리고… 채워지지 않는다. 내가 비워있고 살아있지 않고 뿌듯하지 못하고… 자, 무얼하면 나아질까. 여행, 책, 영화, 영어, 운동, 음악…. 이번 주에는 이문열 전집을 읽는다." 00년 4월11일 장진영 씨의 일기이다.

일기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왔던 그녀, 영화배우 장진영 씨. 지금은 고인이 된 그녀. 이제 자료를 통해서만 그를 볼 수 있다.

아버지의 딸 사랑

전북 임실군 운암면 사양리 옥정호가 끝나는 지점. 그녀의 기념관을 찾기위해 2차선 도로를 조심스레 운전했다. 3km 쯤 갔을까. 큰 입간판에 담긴 그녀의 사진이 기념관을 찾는 사람들을 반긴다.

'국민배우 장진영 기념관'. 영화 '청연'에서 하늘을 날고자하는 주인공 모습이 그대로 머물러 있다.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가을 노래가 기념관 주변을 울렸다.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슬픔이 와락 내게 안긴다.

기념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박하게 모자를 눌러쓴 그녀의 아버지 장길남 씨가 "어쩐 일이냐"고 먼저 물었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싶어서요."
"들어오시오."

아버지는 기념관 바닥을 쓸고 닦고 먼지하나 모래 한 톨도 가만두지 않았다. 짧은 인터뷰 내내 빗자루로 기념관을 정리했다. 마치 사랑하는 딸의 방을 정리하고 관리하듯….
▲ 딸의 보고픔을 달랜 방명록.


보고픔을 참는 아픔

아버지 장 씨는 5월14일 선산 아래에 고 장진영 씨의 기념관을 개관했다.

"내가 진영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를 생각했다. 딸은 갔지만 영원히 내 가슴에 묻을 수는 없다, 나도 언젠가는 갈 길인데…. '진영이에게 영원한 보답으로 하나를 남겨야겠다'생각해서 기념관을 만들기로 했지."

먼저 간 딸의 기념관을 개관하고 나서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는 한마디로 응답했다.

"그거야 말로 다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 그리고 긴 한숨을 내 쉴 뿐. 잠시 말을 잊었다.

"방송에서도 자꾸 찾아와서 인터뷰 해 달라고 하는데 모두 끊었어.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지. 한 잡지사에서 폭우가 쏟아지는데 찾아왔어, 하도 딱해서 그래서 해 줬지. 그게 마지막 이었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놓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의지가 엿보였다.

아버지는 딸이 얼마나 그리우면 기념관에 출퇴근을 할까? 가장 그리운 순간에 대해 그는 "매 순간이 그립지. 이 애가 평상시 부모한테 못한 것도 아니고 따뜻하게 해서, 명절 때나 생일 때나 괴로울 때는 더욱 더 생각나. 지금도 괴로워 죽겠어. 말할 수 없이…."

아버지는 전주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전주에 있다가 보고 싶을 때는 언제고 달려와. 기념관 앞 계암각으로 진영이를 불러내 대화를 하곤 해. 그렇게 저녁이면 아이와 통화를 하며 보고픔을 승화시키고 있지."

딸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내 늘 괴롭다는 그.

"이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고 갈 때는 순서가 없다지만 이렇게 갑자기 가서는 안 되지." 기념관 방명록을 펼쳐봤다. 방명록 마다 이야기가 가득하다. 특히 아버지가 딸에게 쓴 편지는 보는 이를 더 가슴 아리게 했다. 어느 때는 괴로움을 참아낸 흔적이 가득하다. '장진영' 이름 석자를 꾹꾹 눌러썼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빠가'라는 서명도 잊지 않았다.
▲ 전라북도 임실 선산 아래의 계암 장진영 기념관.


웃음으로 일관한 그녀

분위기를 바꿔보려 "장진영 씨는 누구를 더 많이 닮았나요"라는 물음에 "그거야 지 엄마를 많이 닮았어"라고 대답하고 가족사진을 보여줬다.

"이 사진이 진영이가 암 선고를 받고 와서 찍은 사진이여. 금산사 가서 찍었는데 지 엄마를 많이 닮았지." 사진 속 장진영 씨는 웃음 가득했다. 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웃음기 거둬낸 얼굴로 그날을 기념하고 있다.

아버지 장길남 씨는 딸처럼 연예계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부탁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다 내 자식들 같아서 하는 말인데. 젊었을 때, 건강할 때 관리를 좀 했으면 좋겠어. 지금은 젊다고 몸 관리 안하고 일만 하지. 결국 나이 들면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여. 건강할 때 1년 마다 병원 가서 체크해야지. 병들면 별 약을 써도 다 효과가 없어. 소용이 없어. 그것만큼 원통한 것이 어딨어." 그의 목소리는 격앙됐다. 먼저 간 자식에 대한 속상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어 그는 말을 이었다. "진영이가 그 암을 10년 넘게 품안에 넣고 살았어. 그러고도 젊은 혈기로 그렇게 활동했는데 그러면 안 되지. 건강 관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가족과 지인들을 위해서라도 꼭 점검해 봐야 해."

장진영 기념관과 함께 '계암장학재단'이 운영되고 있다. '계암'은 이 지역 명칭을 따라 지은 장진영 씨의 호이다. 고인은 전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전주중앙여고에는 그녀가 죽기 전까지 매년 장학금을 전달했던 모교이기도 하다.

계암장학재단 앞에 2개의 비(碑)가 서 있다. 그 중 계암 장진영의 약력도 새겨있다. 그를 추모하는 문구가 발길을 잡았다.

"푸르러 높아가는 가을 하늘 아래 한송이 국화 영원한 잠에 들다. 고고한 자태를 이제는 직접 볼 수 없지만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 은은한 향기로 남아 숨쉬리라."

2009년 9월1일 위암으로 사망한 그녀. 기념관에는 고인의 13,594일 간의 기록을 남겼다. 장진영의 열정과 노력이 묻어있는 영화 작품과 소품 등 흔적이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우리 곁에 함께 했던 38세의 영화배우 장진영. 이제 그녀는 나이를 계산하지 않는 계암 장진영으로 이곳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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