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만덕산 초선지(좌측)와 원불당의 현 모습.
▲ 만덕산 초선지의 예전 모습.
불법연구회 창립총회가 끝난 며칠 뒤인 5월초(음력)에 소태산대종사는 만덕산 만덕암으로 들어갔다.
만덕암은 좌포 김참봉의 산제당으로 소태산대종사가 1년 전 겨울에 최도화의 주선으로 오창건과 송도성을 수행인으로 하여 3개월여 적공한 곳이다.

만덕암에서는 소태산대종사를 스승으로 성주의 송규, 영광의 김광선·오창건, 임실과 진안의 최도화와 전삼삼·전음광 모자(母子), 노덕송옥과 손자 김대거, 전주의 이청춘, 경성의 박사시화·이동진화·김삼매화 등 12인이 김광선의 주관으로 1개월 선회(禪會)를 열고 선(禪)을 나며 총부건설도 준비했다.

소태산대종사와 창립총회에 참여했던 최초 교화단 중앙단원인 송규와 단원인 김광선과 오창건이 같이 만덕암에 들어와 참여하였고, 최도화는 화주(化主)로 식량을 담당하며 참여했다. 전주의 이청춘은 불법연구회 창립발기인 모임에 유일한 여성으로 참여하였다가 창립총회에도 참여한 후 소태산대종사가 만덕암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선회에 참여했다.

소태산대종사의 첫 상경에서 경성의 첫 제자로 전무출신을 서원한 박사시화는 경성에서 전라도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기 위해 내려왔다가 만덕암 선회에 참여했다.

전삼삼은 최도화의 인연으로 원기7년 변산 봉래정사를 찾아 소태산대종사께 귀의하고, 그 후 소태산대종사가 만덕암에 오자 외동아들 전음광을 데리고 찾아와 귀의시켰다. 그 후 소태산대종사의 명에 의해 전주로 이사하였다가 선회에 모자가 함께 참여했다.

이동진화는 경성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귀의한 후 소태산대종사가 전라도로 내려가자 침모(針母)인 김삼매화와 함께 찾아 나서 임실과 진안 마이산 등을 거쳐 수소문 끝에 만덕암에 찾아와 김삼매화와 참여했다.

최도화는 선을 나며 식량을 시주 받아오던 좌포 노덕송옥의 집에 찾아가 그의 장손자인 김대거에게 "생불님을 뵈러가자"고 자주 권했다. 그리하여 열한 살 난 김대거는 머슴의 등에 업혀 할머니 노덕송옥과 집안의 산제당인 만덕암에가 소태산대종사께 함께 귀의하고 선회에 함께했다.

만덕암 1개월 선회에서는 식량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최도화가 화주로 나서 식량을 구해 그의 아들 조갑종이 쌀가마니를 지고 오기도 하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선회 초기에 한번은 식량을 구하러 최도화가 오창건과 같이 좌포리 노덕송옥의 집에 갔다. 노덕송옥은 곳간에서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최도화는 쌀을 많이 얻으려고 "머슴을 데려 왔으니 쌀 한 짝을 주세요"라고 했다. 옆에 있던 오창건이 머슴이라는 말을 듣고 분통이 터졌다.

오창건이 씩씩거리며 쌀을 지고 만덕암 가까이에 오자 소태산대종사가 마중을 나와 "창건이 오는가?" 하고 말했다. 이 말에 조금 위안이 되었다. 오창건이 소태산대종사께 털어놓았다.

"도화 씨가 저를 머슴이라고 합니다."
"그 년이 그래?"
이 말에 분통이 싹 가셨다.

뒤에 최도화가 소태산대종사에게 말씀드렸다.
"쌀을 많이 얻으려고 제가 사산(오창건)님을 머슴이라 했지요"

소태산대종사는 피차의 세정을 헤아려 응수했다.
"대체, 그러겠네, 잘했다."

만덕암에서 1개월 선을 날 때 박사시화는 공양을 담당하며 식량문제로 몹시 곤란을 겪었다. 선회를 마치고 만덕암에서 내려오면서 그만 설움이 터져서 수 십리 길을 울며 '이번 길에는 우리 생불님 시봉 잘 할 훌륭한 동지를 만나게 하여 주사이다'라고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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