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자비, 영성의 힘은 '절대 마음'이다

▲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한자경 교수(왼쪽)가 "삶의 피로와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은 상대가 없는 절대의 마음이다"고 말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정전〉 의두요목에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궁글리게 했다. 마음의 중요성은 물론, 마음이 부처임을 스스로 체득시키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

마음이 화두로 부각되고 있는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마음인문학연구소가 10월13~14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2011국제학술대회-마음인문학 철학적 성찰과 사회적 치유'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특히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가 발표한 '절대의 마음에 대한 동서사유의 비교'는 마음이 곧 부처로 가는 지름길을 제시하고 있다. 한 교수의 발표 내용을 요약하여 마음에 대한 방향성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주객과 자타의 상대를 넘어선 마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보고 듣고 아는 견문각지심(見聞覺知心)이다. 보고 듣고 알기 위해서는 일단 보이거나 들리거나 알려질 대상이 있어야 하며 마음이 그 대상을 향해 나아가 그 대상을 붙잡아야 한다. 이렇게 대상을 붙잡는 마음을 반연심(攀緣心)이라고 한다. 반연심은 대상을 상대로 성립하는 상대적 마음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심리학이나 의학에서 마음을 연구할 때도 바로 이 마음을 연구한다.

반면 불교가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마음은 자신의 대가 없는 상대를 끊는 절대의 마음이다. 이는 주객과 자타의 상대성을 넘어선 절대의 마음을 말한다. 상대적 마음을 넘어서는 이 절대의 마음을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이 절대의 마음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나의 인격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분별하고 사유하는 마음인 분별각관심은 눈앞의 경계인 육진으로부터 생겨나고 또 그 경계가 멸하면 함께 사라지는 것으로써경계가 만든 그림자에 불과하기에 본심일 수 없다. 한마디로 본심은 경계와 경계로 인한 그림자가 다 사라져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마음이다.

경계 너머에서 경계를 보는 본심

예를 들면 우리가 극장에서 영화를 기다리며 스크린을 보고 있어도 스크린이 아직 어둠에 싸여있거나 혹은 영사기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도 아직 필름이 돌아가기 전이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영사기 필름이 돌아가고 스크린 위에 채색된 세계가 전개되어야 비로소 뭔가를 보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필름이 돌아가기 전부터,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보고 있다. 그렇게 지속되는 우리의 봄, 견(見)에는 변화가 없다. 어둠에 쌓인 빈 스크린을 보다가 그 위에 채색된 세계를 본다고 해서 견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며, 다른 견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없던 견이 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스크린 위에 전개되는 세계, 견의 대상은 바뀌지만 어둠을 보든 빛을 보든 색을 보든 견은 항상 동일한 견으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경계 너머에서 경계를 보는 본심이다. 절대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장에서 단지 화면을 보는 관람객인 것이 아니라 화면을 만들어내는 자, 즉 광원과 필름을 갖춘 영사기에 해당한다. 영사기가 빛을 발해 스크린 위에 영상세계를 그리듯 우리의 본심은 본래의 밝음인 본각묘명으로써 빛을 발해 허공속에 현상세계를 그려낸다. 스크린 위 영상세계가 영사기 내 필름의 투영이듯이 각자의 마음이 그려내는 세계(경계상)는 각자의 마음안에 담긴 종자(잠재에너지)의 현행화(구체화)이다.

본원청정심은 항상 스스로 널리 밝고 두루 비추는데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그저 견문각지를 마음으로 여겨 견문각지에 의해 가려져서 결국 정명한 본체를 보지 못한다. 모든 중생이 이 본명을 잃어버리기에 종일 행하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해 헛되이 윤회로 빠져든다.

내가 본심이 있다면 내가 왜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극장에서 어둠뿐인 또는 빛 뿐인 빈 스크린을 대면하면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체가 어둠이어서 그 안에서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구분되지 않으면 우리는 보이는 것이 없고 따라서 봄도 없다고 생각한다. 전체가 보고 있는 마음의 빛이어도 그 빛이 무한이고 절대이면 우리는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스크린 위에 채색된 세계가 펼쳐지기 이전부터 허공 중에 홀로그램우주가 그려지기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마음은 이미 깨어서 보고 있다. 깨어있는 전체로서의 마음인 본심은 자신을 신령스럽게 아는 성자신해(性自神解), 보이거나 들리는 것 없는 곳에서도 신령스럽게 깨어있는 공적영지(空寂靈知), 한마디로 본각(本覺)의 마음이다. 단지 그 본각의 밝음이 상대가 아닌 절대이기에 우리의 의식은 그것을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분별하여 밝히려 한다.

절대는 자신의 대가 없기에 우리는 그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다. 락(樂)의 의미는 고(苦)를 통해 알려지고 낮의 의미는 밤을 통해 알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한계가 보이지 않는 무한, 상대가 없는 절대를 우리 스스로 감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이미 부처인 것

우리는 한 번도 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물고기는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절대인 것,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추상할 수 없는 것, 그런 절대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상대적 차이가 드러나지 않고 따라서 차이를 통한 분별이 행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마음이 거기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암실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스크린 위에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 허공 중에 기세간이 그려지기 이전, 나의 현재 삶이 전개되기 이전, 부모가 나를 낳기 이전, 나의 마음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공적을 보고듣는 마음, 빈 스크린을 바라보는 마음, 그렇게 삶 밖에서부터 생멸의 삶을 바라보는 불생불멸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본심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불교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절대는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미 성자신해의 본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문제는 그렇게 항상 갖추어져 있는 절대의 마음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본심과 본각은 이미 누구나 갖고 있다. 누구나 절대의 마음으로 무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 누구나 이미 부처인 것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본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바깥에서 마음을 구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수능엄경〉에는 '이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은 무시이래로 허공과 수명이 같아 일찍이 생한 적도 없고 일찍이 멸한 적도 없으며 일찍이 있었던 적도 없고 일찍이 없었던 적도 없다. 이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법이니, 일념이라도 참을 여의면 모두 망상이 된다. 마음으로써 다시 마음을 구할 수 없고, 부처로서 다시 부처를 구할 수 없고, 법으로써 다시 법을 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당장 무심하여 묵연히 계합할 뿐 마음을 헤아리면 곧 어긋난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절대의 마음으로 여기고 상대적 현상세계를 환이라고 여기므로 그 절대의 진여심을 증득하여 윤회를 벗고 해탈하고자 수행을 강조한다. 우리의 본심인 절대의 마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인간 및 모든 생명체가 현상적 규정성과 제한성을 넘어선 자유의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점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의 피로와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힘, 지혜와 자비의 힘, 영성의 힘은 바로 이 절대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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