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추산 서중안 선진.
▲ 익산에 총부기지를 정하고 최초로 지어진 도치원(본원실).
소태산대종사는 이리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마치고 만덕산 만덕암 1개월 선회(禪會)에서 총부건설을 준비했다.

총부 기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여러 회원들과 이리 부근 각지를 일일이 순시하며 의견이 분분하다가, 결국은 북일면 신룡리(현 중앙총부)에 총부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원기9년 9월29일자로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 344의 2번지 11,554㎡을 매입했다. 이 땅은 북일면 신동에 사는 류신차의 소유로, 박원석이 소개를 하고 서중안 회장이 700원을 희사하여 매입했다.

가을에 접어든 10월8일(음력 9.10) 익산 송학리 박원석의 집에서 임시 간부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는 창립총회에서 평의원에 선출된 8인 모두가 참석하여 서중안 회장의 진행으로 회관 건축건과 임원 보선의 건이 논의됐다. 의연금 모집위원인 송만경이 "이미 수합된 돈으로 공사에 착수하는 일방 의연 미수금은 계속 모금하도록 합시다"고 하자 전원이 찬성했다.

건축 공사는 서무부에서 주관하기로 하고 송만경은 계속 재정을 담당하기로 했다. 임원은 7부서 중 서무부와 연구부 부원만 선임했다. 서무부장에는 건축에 능한 오창건, 연구부장에는 송규(정산종사), 서무부 서기에는 송도성을 선임했다.

회관 건축비로 서중안 회장이 600여 원을 희사하여 정읍 신태인에 있는 어느 사무소의 재목을 옮겨와 7칸 겹집의 공사가 활기를 띠었고, 아래채는 원평 회원 조송광이 구월리 어유동 처가집의 가옥 일부 재목을 옮겨와 10칸짜리 집으로 진행했다. 공사 중 각처 회원으로부터 700∼800원의 의연금이 수납됐다.

평의원회 때 공사위원으로 선임된 오창건을 위시하여 김광선, 건축에 경험 있는 김남천, 송적벽, 송규와 송도성 형제가 공사에 임했다. 회관건설 때 여자회원들은 숙소 등의 문제로 참여하지 못하여 서무부 서기로 임명된 송도성이 공양주 노릇을 했다. 송도성은 찬바람을 맞으며 우물에 쇠줄로 만든 두레박줄을 당기며 물을 펐다. 손바닥에 쩍쩍 얼음이 붙었고 손등은 터지고 피가 엉겼다. 난생 처음 해보는 밥 짓는 일이라, 갓 배운 솜씨로 쌀을 일면 조리질을 따라 머리도 끄덕 끄덕 돌아갔다.

서중안 회장은 소태산대종사가 부재할 때는 김제에서 운영하는 약방에 바쁜 일이 있어도 낮에 일을 보고 오후 늦게 자전거를 타고 총부건설 현장에 와서 공사 진척상황을 살폈다.

엄동상설을 무릅쓰고 11월경(음력)에 이르러 7칸 겹집 한 채와 10칸 한 채를 초가로 준공했다. 총부의 최초 회관을 소태산대종사는 도치(盜峙)란 이름을 고쳐 '도치원(道峙院)'이라 이름하고, 서중안이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라 써 회관 기둥에 걸었다.

도치원 본관 7칸 초가겹집은 부엌이 하나, 방이 3칸으로 대중 집회시 미닫이 벽을 터 강당으로 사용했다. 서쪽 부엌에 붙은 방을 서아실이라 부르며 소태산대종사가 사용하였고, 동아실은 대중방으로, 가운데 방은 객실로 사용하였으며, 선(禪) 때는 교무실과 부인 공부방으로 이용했다. 상황에 따라 소태산대종사가 동아실을 사용하기도 했다. 본관 옆 10칸짜리 이 초가집은 엿을 곱는 일을 하여 '엿집'이라 불렸다.

총부건설 당년의 전무출신은 영광(영산)과 익산을 통하여 십수 명이며, 회원 상황은 영광, 김제, 전주, 부안, 경성, 진안 각지에 남자 약60명, 여자 약70명으로 총합 130명이었다. 자산은 영광 방언답이 백수십 두락이요, 영산성지, 부안 봉래정사와 익산에 총부 회관을 합하여 건물이 약 수십 칸이 되며, 방언답은 아직도 해독염독(海毒鹽毒)이 다 해소되지 못하였으므로 도조(賭租)수익이 근 십여 석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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