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 종사는 1907년 경북 성주에서 송벽조와 이운외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도열(道悅), 법명은 도성(道性), 주산(主山)이 법호입니다. 아시다시피, 주산은 원불교 회상에서 독특한 위상을 누리고 있습니다. 2세 종법사인 정산 종사의 유일한 아우이기도 하고, 교조 소태산대종사의 사위이기도 하다는 혈연적 위상도 물론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비록 사후 추존일 망정 법위가 원불교 교법상 최고위인 대각여래위에 올라 있습니다.

그는 13세에 형을 따라 영산으로 이사하고, 16세에 변산 봉래정사로 대종사를 찾아가 출가를 서원하여 시자생활에 들어갑니다. 20세에 이미 경성(서울)교당 초대교무가 되고 31세에 교정원장이 될 만큼 조숙했던 것 같습니다. 대종사 사후 정산이 종법사가 되자 37세 나이에 수위단 중앙단원이 됩니다. 차기 종법사를 예약한 것처럼 보입니다.

해방이 되자 그는 '동포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는 거리로 간다'는 구호를 외치며 전재동포구호사업에 나서게 되는데, 서울에서 구호사업에 몰두하는 중에 이재민으로부터 전염병(발진티푸스)에 감염되고, 1946년 3월 세수 40이란 아까운 나이에 열반에 들고 맙니다.

문학적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금강원인(金剛院人), 직양(直養) 등의 필명으로 비교적 풍부한 문학 활동을 했습니다. 사후 61년이 되는 2007년에 460쪽에 이르는 문집이 발간되었지요. 이는 그의 문필 업적을 전반적으로 수렴한 것이기에 좁은 의미의 문학작품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문학적 자취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가운데 문학작품은 거의가 〈월말통신〉, 〈회보〉 등 공적 지면에 발표된 것이란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생산만 된 것이 아니라 소비가 되었고, 소비된 만큼 교단에서 그의 문학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연보에 의하면 주산은 4세부터 사숙에서 조부 송성흠에게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고, 13세에 두문불출하며 정진하여 문리를 터득했다고 합니다. 조부는 물론 부친인 구산 송벽조, 형인 정산 송규 등 집안이 온통 학문적 환경이었으니 일찍이 한학에 입문한 것은 당연하기도 하지만, 천성이 호학인 데다가 학문적 성취 역시 빨랐던 모양입니다.

주산은 〈맹자〉와 같은 경서를 탐독했으니 그의 필명 직양도 출전이 〈맹자〉입니다. 또한 그는 소동파의 선시를 애독했다고 전합니다. 유가의 경서와 소동파의 선시, 이 두 가지가 주산문학의 배경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듯합니다.

주산송도성종사법문집 '마음은 스승님께 몸은 세상에'에 실린 내용 중에는, 본인이 손수 만든 작품이 아니어서 주산의 문학 유산에 넣을 수 없는 것이 많기는 합니다. 대종사 법문을 받아 적고 정리한 수필법문이 많고, 고문헌에서 발췌 번역한 조사들의 전기 〈불해탐주〉도 있고, 〈수심결역해〉 같은 것도 있습니다. 아, 참! 〈대종사 약전〉도 있어요. 이건 정산 종사의 〈불법연구회창건사〉와 내용이 겹침으로 비교 검토의 여지가 있는 흥미로운 자료더군요.

본격적 연구자료가 될 문학유산은, 추모사업회 편집에 따르면 논설문, 추도문, 견문록, 기행문, 시가, 서한 등이 될 듯합니다. 그 중에도 문학성이 높은 분야는 시가(가사, 창가, 신시, 시조, 한시)로 분류된 20여 편의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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