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지옥, 비유일 뿐 분리된 초월적 세계 따로 있지 않아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1910~1987)회장의 종교와 신에 관한 질문이다.
최근 중앙일보(12월17일자)에 '이병철 회장, 타계 한 달 전 24개 영적 질문 차동엽 신부가 24년 만에 답하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이와 관련된'삶과 죽음'에 관한 몇 가지 물음을 원불교 교리에 바탕해 응답해 보려 원광대 김도종 교무(교수·인문학부 철학과)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 김도종 교무가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응답했다.
그는 중앙일보의 기사를 본 느낌에 대해 "철학적이거나 깊은 종교적 질문이라기보다는 보통사람이 종교나 삶, 죽음 문제에 조금 관심 가지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평범한 질문에 깊이 있게 답할 수 있는 종교가 대중적으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고 첫 소감을 밝혔다.

-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신이 존재하는가의 여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그리스트교 신학, 서양철학의 핵심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 질문은 인격적인 신의 존재 문제였다. 인격적인 신은 지상의 세계로 부터 벗어난 초월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세계관, 즉 이원론적인 세계관의 기초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불교적인 세계관은 초월적인 세계가 따로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질문의 형식을 바꾸어 보도록 권유할 수 있다. 신에 관한 질문은 신 그 자체 보다는 나의 힘으로 통제 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에 관한 질문이다 (〈정산종사 법어〉 경의편 40장 인용). 그 힘은 큰 우주와 모든 개체를 하나로 관통하는 기(氣)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전통 사상인 '기의 철학, 기의 과학'을 원불교에서는 '영기질(靈氣質)론'으로 이해하고 있다.(〈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3장 인용) '기'는 정신과 물질의 근원체다. 서양에서는 정신이나 물질 그 자체를 존재철학적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지만 아시아 철학은 정신과 물질 이전에 '기'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즉 '영기질'론으로 보면 '기'로 부터 물질과 정신이 나온다.

'기'는 생생약동하는 힘이며 원리다. 생생약동하는 힘을 유지하는 방법은 여러 형태를 가진 개체들의 밀고 당기는 힘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로 보면 사람들의 인생이나 모든 생태계, 행성들의 관계가 결국은 우주의 존재방식이다. 이러한 우주적 존재방식을 원불교에서는 '네가지 은혜'의 범주로 이해한다. 여기서 '모든 것이 부처'라는 이론도 탄생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은 자신을 감춘 적이 한 번도 없다.

오늘날에는 '초월적인 힘'을 향한 열망이 종교가 아니라 과학의 영역에서 현실화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명과학, 정보과학, 우주과학자들의 동기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힘을 현실화 해보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크리스트교는 고통과 불행은 신이 준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은 모든 만물이 아니라 왜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었느냐고 물을 수 있다. '악(惡)'의 실체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 아니다.

신에 관한 질문을 우주를 관통하는 초월적인 힘에 관한 질문으로 바꾸자고 권유했다. 인격적인 신을 전제로 했을 때 '사랑'이라는 가치 철학적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초월적인 힘'의 관점으로 볼 때 드러나는 '사은(천지·부모·동포·법률, 네 가지 은혜)'의 범주는 존재철학적인 것이다. '고통과 불행'도 가치 철학의 관점이 아니라 존재 철학의 관점으로 이해해 보자.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영기질'론으로 부터 시도해 보자. '기'가 운동하는 원리는 음양상승과 인과보응이다. 인도의 철학과 종교는 인과보응의 원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철학과 종교는 음양상승의 원리를 중심으로 만들어 졌다. 원불교는 이 둘을 종합하고 있다. 고통과 불행은 음양상승 과정의 하강(下降)국면이다. 인과론으로 보면 개인적인 업(業)에 따른 하강 국면이다. 사람들은 우주적 하강 국면인 가을과 겨울을 고통과 불행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다만 개인이 상생의 인과를 만드는 일을 하여 그 고통과 불행을 벗어나는 상승(上昇)국면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중요하다(〈정산종사 법어〉 원리편 40장 인용).

한편 질문의 영역과 범주를 명확하게 해야만 올바른 대답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죽음은 존재철학적 범주이고 고통이나 불행은 가치철학의 범주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주의 힘은 존재 철학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 철학의 문제를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 생성과정의 문제로 이해하는 깨달음을 갖는 것이 해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인의 생사과정을 통하여 큰 우주가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유지한다는 말이다.

- 영혼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영혼은 우주와 나를 연결하고 있는 고리, 또는 끄나풀이다. '영기질'론으로 보면 생생약동하는 기는 물질로 생성되는 한편 '근본적인 알아차림'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기질(氣質), 기식(氣識), 기령(氣靈)의 구조를 가진 것이 이것이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원리가 '근본적인 알아차림'이다. 우주의 근본적인 알아차림이 나 자신을 구성하는 '영기질'의 알아차림으로 이어지는 것이 영혼이라는 말이다. 우주와 '나'는 먹고 배설하는 일, 호흡하는 일을 통해 끊임없이 우주의 힘과 하나 되는 물질적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영혼을 통하여 우주의 근본적 알아차림을 내 안에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혼은 깨달음과 수련의 정도에 따라 여러 단계의 형태를 가진다. 우주적인 문제, 삶과 죽음의 본질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은 우주와 하나 될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우주의 순환과정에 자기도 모르게 휩쓸려 가는 사람이다. 동식물은 그러한 문제의식이 없으므로 개체를 형성하고 있다하더라도 우주의 순환과정에 휩쓸리는 영혼을 가진 것이다.

영혼은 또한 '나'라는 존재가 전생윤회(轉生輪廻)할 때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식물이나 동물의 씨앗은 같은 개체로 유전하며 진화나 적자생존의 방식으로 우주의 순환과정에 휩쓸린다. 다만 사람의 영혼은 신앙과 수행의 노력에 따라 영혼의 단계와 형태가 달라져서 후생에 결과되는 개체의 형태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신앙과 수행정도에 따라 사람이 되기도 하고 동물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 영혼을 품고 있는 '기'의 파장이 깨달음과 수행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이 죽어도 그 '기'의 파장은 남아서 새로운 형태의 '영기질'의 구조를 가진 개체로 나타난다.

-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천국이나 지옥은 삼생관(三生觀)을 가진 지역에서 말할 수 있다. 즉 전생에는 모두가 평등하게 하나님 나라에서 살았고, 하나님이 창조한 지상의 세계를 거쳐 죽음 이후에는 일생의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아, 영원한 천국이나 영원한 지옥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무한하고 영원한 전생윤회관을 가진 경우에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바꾸어 볼 수 있다. 천국이란 후생에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고. 지옥이란 그 반대의 경우이다. 앞에서 영혼은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전생윤회의 씨앗이 된다고 했다. 전생윤회의 과정은 음양상승과 인과보응의 원리가 적용되는 과정이다. 자신이 일생동안 행한 업(業)에 따라 후생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한 가족이 세대를 이어가며 유사한 체질, 기질, 성질이 유전되는 것을 보면 전생윤회 과정의 일단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물론 씨족, 종족, 민족에 따라 체질, 기질, 성질이 유전되는 것으로 확대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우주적 과정을 지속적으로 지탱하는 것은 수 많은 개체들의 삶과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개체들은 일정한 생태계를 형성한다. 그 생태계는 개체에 따라 성질도 다르고 수명도 다르다. 거기에 다 합당한 '기'의 파장, 영혼의 파장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의 현실에서 좋은 환경과 조건이 무엇인가는 쉽게 알 수 있는 만큼, 그것을 위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져야할 삶과 죽음의 태도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우주 순환과정의 일부라고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전생윤회 한다는 것을 알면 인류의 생활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한편 많은 원불교인들은 이 이치를 깨달아 생사문제를 해탈한 태도를 보여주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간혹 삶을 체념하는 것을 해탈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고쳐야 한다. 병든 사람이 치료의 노력을 포기하고 체념한 상태로 후생에는 건강하게 살겠다고 희망하는 것은 인과의 이치에 맞지 않다는 말이다. 후생에 건강하려면 현생에서 마지막 까지 건강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후생에 총명하거나 부자로 살고 싶은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체념이 해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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