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근을 사용할 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쓰라고 하셨다. 앞의 글(일원상의 수행)에서 언급한 것처럼, '원만구족 지공무사'는 일원상 진리의 여러 표현 중 하나이다.

고대 인도어로 써진 불교의 초기 교서의 '혜(慧)'에 해당하는 말을 영어로는 흔히 'wisdom(지혜)'으로 번역을 한다. 하지만, 미국의 많은 불교학자들은 '혜'의 번역으로 'as it is(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여기에 컵이 하나 있다. 그 컵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가격을 먼저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색상을 먼저 보기도 할 것이고, 아이들이라면 '어떻게 가지고 놀까'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보는 사람의 경험, 나이, 교육 수준, 문화적 배경 등에 따라 같은 컵이라도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다.

컵의 경우야 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과를 독약으로 본다든가, 독약을 사과로 보는 경우에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전도몽상(顚倒夢想) 속에서 대부분의 우리들은 살고 있고, 이것이 중생들이 죄업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된 원인이다.

어느 상에도 주착함이 없는 것이 '원만구족 지공무사'이고,(경의편 43장) 원근친소에 편착함이 없는 것이 '지공 무사'라고 하셨다.(경의편 42장)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삶의 표준으로서의 '원만구족 지공무사'는 'as it is(있는 그대로)'의 의미와 비슷해 보인다. 상황이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것, 즉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을 물로 보는 것이야말로 깨달은 사람의 행이라 할 수 있다.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는 것',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는 것',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것(應無所住而生其心)' 등이 모두 같은 말로서 일원상 진리를 행의 표준으로 잡아주신 말씀들이다.

수양은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는 공부이며(정신수양), 선(禪)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이다(무시선법). 우리의 모든 공부가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공부 아님이 없지만, '있는 그대로' 보고 듣기 위해서는, 정신수양 공부, 특히 좌선 등의 정시선(定時禪)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대종사께서는 "우주의 진리를 잡아 인간의 육근 동작에 둘러씌워 활용하는 사람이 곧 천인이요 성인이요 부처니라"고 하셨다.(〈대종경〉불지품 12장) 육근을 사용할 때마다, '지금 나는 육근을 진리에 맞게(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나는 일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있는가?' 대조할 일이다. 원상을 7개(큰 원상 1개, 작은원상 6개)나 직접 그려 넣어주신 본의도 새겨볼 만하다.


<오렌지카운티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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