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송(偈頌)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로 된 글귀'라는 뜻의 범어(梵語) 음역인 '게'와 한어(漢語) 의역인 '송'의 합성어이다. 원불교에서 게송의 의미는 '불보살이 깨달은 진리를 시구 형식으로 전하는 것'으로 좀 더 구체화 된다. 대종사님의 게송은 일원상의 진리를 시구의 형식을 빌려 압축, 요약한 법문이다.

게송(성리)은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대종사님께서는 '사량'이 아닌 '관조'로 깨쳐 얻으라고 하셨다.(성리품 31장) 사량은 분별심과 주착심, 습관과 업력에 끌리어 나는 망상으로 생각하며 헤아리는 것이고, 관조는 경계를 대하매 분별심과 주착심이 없는 영지로 자성을 회광반조 하는 것이다.(원리편 11장)

그렇다면, 분별심과 주착심을 완전히 놓지 못한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주자학을 집대성한 중국 남송의 주희(朱熹)는 평생 학문에 몰두한 유학자이다. 나이 50이 넘으면서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예전처럼 많은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시력 때문에 생각이 쉬는 시간이 많아지던 그 때 그가 평생 동안 풀지 못해 왔던 많은 철학적 이슈들이 해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저녁 내내 방향조차 잡지 못하던 설교 안을 다음 날 아침 좌선 직후에 순식간에 작성해 버린 경험이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인 이시형 박사는 우리의 잠재의식(측두엽)은 잠이나 산책 등으로 의식(전두엽)의 억제가 풀리는 동안 보다 자유롭고 활발하게 기능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청히 있다고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는 않으며,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끝에 찾아오는 행운이라고 말한다.

'관조'라는 말에 사로잡혀 좌선 후 의두 연마 시간이나 폼 잡고 산책하는 시간에만 성리연마를 미룰 것이 아니다. '사량'이 아닐까 너무 염려 말고, 책 펴놓고 시험공부 하듯 치열하게 사리를 연마하고 궁구하자. '마음이 맑고 조용할 때에 잠깐 연구'하는 '관조'는 그 다음이고, 본인의 수행 정도에 따라 관조의 '질'과 깨침의 '수준'은 결정된다.

'유(有)'는 변하는 자리요,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이다.(성리품 31장) '돌고 돌아 지극 하면' 결국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의 유무 초월의 자리인 '구공(俱空)'에 이르게 된다. 구공은 진공이기 때문에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묘유(구족·具足)'가 나타나게 된다. 구공이기에 구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에게, 임종 직전이 아닌 2년 전에 게송을 전하여 준 것도 '선천시대'가 아닌 '후천개벽시대'에 걸맞은, 재가 출가가 평등하고 민주적인 원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미주서부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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