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성 교도·영산선학대학교(논설위원)
우리 원불교인들이 많이 독송하는 경인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후반부에는 한문으로 해석하지 않은 고대 산스크리트어인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 단어들이 나오고, 범어의 주문이 한 줄 첨부되어 있다.

고집멸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는 까닭에/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마음에 거리낌도 없고, 거리낌이 없기에 두려움도 없으며, /꿈속에서 처럼 뒤집어지는 것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마침내 열반의 길에 들어간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그래서 알지니, 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이며, 대명주이며, 무등등주다. /일체의 모든 고통을 제거할 수 있고, 진실하여 헛되지 않으므로/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 (이상 필자 번역)

원문에서 '보리살타(菩提薩埵)', '반야바라밀다고(般若波羅蜜多故)', '아뇩다라삼약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薩婆訶)'는 인도의 언어인 범어를 가차(假借)하여 표기한 것이다.

당시 불경의 번역을 맡은 승려들이 범어를 번역하지 않고 가차한 이유는 굳이 한문으로 번역하지 않아도 이들의 의미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불경 가운데는 다라니경(多羅尼經)처럼 범어로 된 원문마저도 가차의 방법으로 표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의 현장(玄奘
, ?602~664) 스님 이후 범어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이 확대됨에 따라 점차로 불교는 중국화되기에 이르렀고, 승려들도 어려운 범어를 점차 배우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범어는 불교인들의 언어 속에서 점점 의미를 잃게 되었고, 범어로 표현된 경전의 구절들은 뜻도 모른채 의식에서 사용되는 주문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얼마 전 갓 입학한 교우들과 대화 끝에 '우주만유의 본원'에서 '우주만유', '제불제성의 심인'에서 '제불제성', '일체중생의 본성'에서 '일체중생'의 뜻을 새길 일이 있어서 질문을 던진 일이 있었는데, 상당수의 교우들이 정확한 뜻을 몰라서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예비교역자들에게 정전을 암송하는 데에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정전 속에 나타난 한자어의 뜻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현재 원광대 원불교학과나 영산선학대를 졸업하는 예비교역자들은 의무적으로 3급 한자급수시험에 합격을 해야 졸업할 수 있다. 한자 교육의 중요성을 우리 교단에서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3급 한자급수시험에 합격한 것만으로 예비교역자들이 한자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을까?

필자의 의견은 부정적이다. 현재 한자급수시험은 시행 단체에 따라 한자를 읽을 줄 아는 정도만을 측정하는 시험도 많기 때문이다.

한자는 읽을 줄 아는 정도로 끝나서는 한자의 문맹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자 교육은 부수와 자근을 구별하고, 표준 필순으로 정확히 쓰는 훈련을 함께 해야 그 자형이 가진 의미를 변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전서도 쉬운 한글로만 편찬되어 있어서 한글만 깨우치면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리 내어 읽는 것과 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한자를 읽고 쓰는 사람들이 많았을 때는 한글로만 표기해도 무방했지만 한자어의 독해 능력이 떨어지는 시대에 한글 전용은 한자어를 범어의 주문처럼 표기하자는 것과 같은 얘기다.

이런 상태가 심화되면 아마 원불교전서에 어려운 한자어가 많아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우니 쉬운 말들로 다시 편찬하자는 의견도 제기될 수 있다.

예비교역자들이 졸업 후, 한자어 능력이 떨어지는 교도들을 대상으로 교화 활동을 펼 때 교서의 한자 사용 능력은 필수적이다. 한자를 활용할 수 있도록 예비교역자 양성의 교육 과정에 한자 교육의 강화가 시급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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