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탁류, 금강 하구 구불길

멀지 않은 길을 찾아 나섰다. 며칠 동안 몸 앓이를 한 탓에 다소 윤기 잃은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유난히 금빛 갈대숲이 많은 금강(錦江)하류 강물은 군산의 아픈 역사만큼이나 여전히 흐린 탁류다. 달리는 차창 안으로 가득 담겨지는 겨울 햇살, 마음이 살랑거렸다. 기분 좋은 출발은 백릉 채만식을 만나는 설렘으로 이어졌다.

1930년으로 시간여행 출발

우선 군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근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은 모두 4400여 점의 유물과 자료가 전시돼 있다. 이중 2250점이 군산시민과 단체들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지난해 9월30일 개관한 박물관은 그렇게 시민들의 열정으로 만들어졌음을 방증한다.

관람의 백미는 3층 근대생활관이다. 근대의 중간 길목인 1930년을 테마로 그 시절의 풍속과 애환을 담아냈다. 인력거방과 잡화점, 술도매상, 내항 창고, 군산역 등 건물 11채가 재현돼 있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묘사되고 있는 군산 만월표 고무신집과 뜬다리 부두, 되로 팔던 성냥개비와 지게, 막대저울도 볼 수 있다. 눈길을 끄는 자료도 많다. 옥구 구마모토 농장 토지대장과 상공인 회계서류 등을 전시했다.

군산의 근대사는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함축됐다. "군산은 인근의 호남평야와 항구를 끼고 있는 지역적 특성으로 혼란했던 한국사에 시대적 배경지로 자주 등장했지요. 도심에 남아있는 근대문화유산의 형태적 특성을 알고 답사길에 오른다면 좀 더 많은 근대문화유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 근무하는 정숙희 문화관광해설사가 답사길의 이해를 도왔다.

이 중에서 핵심 구간이라면 단연 구불 6-1길이다. 구불 6-1길은 〈탁류〉의 무대가 되는 군산항 주변 구시가지 골목을 헤집는 길로, 탁류길이라고도 불린다.

문화해설사의 친절한 안내로 구불 6-1길, 첫 출발점인 구)군산세관 본관을 찾았다. 이곳은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의 하나로 현재는 호남관세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멀지않은 곳에 군산내항 부잔교, 일명 뜬다리부두가 있다. 물 수위에 따라 다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여 뜬다리부두라고 했던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총 6개가 만들어져 연 80만톤에 달하는 우리의 미곡을 수탈해 갔던 곳이다.

밤낮으로 쌀을 실어냈다는 선창의 철도는 녹슨 채 잠들어 있었다. 할 일을 잃은 채 무심하게 길손을 맞고 있는 뜬다리 부두에 정박해 있는 고깃배들, 조선의 사회상을 풍자한 〈탁류〉 속 주인공 초봉의 슬픈 삶도 무심하게 묶여있는 건 아닐까. 소설 속의 탁한 금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구불 6-1길은 문화재청이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지정한 지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구불 6-1길을 걷다 보면 눈에 익은 건물이나 거리가 자주 나타난다. 파란 대문과 붉은 담장이 인상적인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영화 '타짜'와 '장군의 아들'에 나온 집이다. 키 작은 가로수가 늘어선 낡은 골목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녀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 그 골목이다.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난 지금, 조금은 버거운 듯 버티고 있는 건물들의 흔적은 이제 우리 자취의 일부가 되어 먼지 뽀얀 세월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렇게 구불 6-1길은 굴곡 많은 우리네 삶을 닮아 있었다.
▲ 채만식의 치열한 삶의 여정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는 채만식문학관.
▲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소설 〈탁류〉의 시대상을 묘사하고 있다.
여전히 '탁류'가 흐른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몰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채만식, 〈탁류〉 부분)

돈은 없었지만 감색 상의에 회색 바지를 깨끗이 입고 모자까지 쓰고 다녀 '불란서 백작'으로 불렸던 작가 채만식. 내성적 성격에 외곬스러운 면까지 지녀 폭넓은 교우관계를 갖지는 못했다. 남의 집에서 식사할 때는 수저를 닦아먹을 정도로 결벽했다는 그. 생전에 1천여 편이 넘는 작품을 남긴 그의 말년은 쓸쓸했다. 노후성 폐결핵으로 길지 않은 생을 마쳤다.

이제 그를 만나기 위해 구불1길로 행했다. 금강 제방을 따라 18.7Km나 이어진 길, 그 길에 채만식 문학관이 있었다.

"백릉 선생이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1930년대에는 많은 세태 풍자소설이 발표되었어요. 하지만 채만식 선생처럼 자기 시대의 현실을 뼈저리게 고민한 결과로 세태풍자 소설을 발표한 작가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풍자성은 무엇보다도 신랄함에 그 핵심이 있지요." 근대역사박물관에서 만났던 정숙희 문화해설사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탁류〉를 비롯 20편 넘는 채만식의 작품을 정독했다고 했다.

채만식문학관 1층 전시실, 채만식의 치열한 삶의 여정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었다. 가난, 고독, 질병과 싸우면서도 시대상을 고발하고 풍자로 사회에 맞서던 그도 결국 일제 말기에 이르러 시대와 타협하고 만다. 이 무렵 내놓은 작품은 친일소설로 분류된다. 해방 후 채만식은 자전적 성격의 단편 〈민족의 죄인〉을 통해 자신의 친일 행위를 고백했다.

그러나 채만식은 아직도 해석이 덜 끝난 작가이다. 채만식문학관은 그의 작품세계를 보여주기에는 불충분했다. 그만큼 우리가 그의 고민에 대해서 터무니없을 만큼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주는 장소인 건 아닐까.

문학관 주변, 콩나물고개를 상징하는 둔뱀이 오솔길을 걸으며 하구언 댐의 일몰을 바라본다. '민족의 죄인'이라 스스로 불렀던 채만식의 지난했던 삶의 여정을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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