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중앙총부 대각전 봉불 낙성 기념 사진.
▲ 중앙총부 대각전 불단 모습.
소태산대종사는 깨달음(大覺)을 얻은 후 깨달은 진리를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라고 했다.

이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는 '한 두렷한 기틀'이라는 표현이 곧 일원상(一圓相)을 뜻한다.

원기4년 영산에서 법인성사 후 소태산대종사는 수양할 곳을 물색하며 김제 모악산 금산사 송대에서 얼마간 체류했다. 여기서 짚신을 삼기도 하면서 거처하는 출입구 문미(門楣) 벽지에다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으로 그렸다.

소태산대종사는 개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여러 차례 '일원상(○)'을 표현하였지만 직접 형상으로 그려 보이기는 이때가 처음이다.

그 후 변산 제법시절과 익산총부 건설 후 제자들에게 수시로 일원상 진리를 깨쳐 나가도록 가르쳤다. 원기14년 10월29일 소태산대종사는 기차로 경성을 가기위해 이리역으로 가다가 남바우 언덕길에서 조송광과 전음광이 우주 본가의 소식을 묻자 땅바닥에 '○(일원상)'을 그려 보이며 "이것이 큰 우주의 본가이니 이 가운데 무궁한 묘리와 무궁한 조화가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다"고 역설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여러 면에서 일원상의 소식을 추상적인 표현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혹은 노래 혹은 직접 그려 보이기까지 하며 조금씩 인식시켜 나갔다.

총부 공회당은 원기14년에 건립한 총부 강당으로 예회와 동·하선, 좌선, 염불 등을 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소태산대종사의 뜻에 따라 송도성이 '심불(心佛)'이라 쓰고, 그 아래 '○'을, 그 아래 '사은지본원(四恩之本源) 여래지불성(如來之佛性)'이라 종(縱)으로 쓴 족자를 공회당 벽에 걸었다.

원기19년 3월26일 제6회 총대회에서 익산기념관 건축기성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때 자원으로서 위원에 임한 회원이 125명이다.

그리하여 남녀위원장에 류허일과 이공주가 추천되고, 건축성금은 위원회에서 최선의 방법을 택하기로 하고 반드시 회원들의 자발적 희사를 받도록 했다.

그리하여 원기20년 초부터 육영부에서 경영하는 복숭아 밭 위 언덕에 터를 다듬었다. 서정원장 이재철과 사무원들의 감독으로 차질 없이 공사가 진척되어 상량식을 원기20년 3월14일 거행했다.

원기20년 4월27일(음력 3.25)까지 목조와즙 287.59㎡(84평) 공사를 완공하고 기념관의 이름을 '대각전(大覺殿)'이라 했다.

대각전은 일식 목구조를 주된 구조로 부분적으로 전통적 기법을 수용한 근대 건축양식으로 지었다. 지붕은 시멘트기와로 우진각을 구성하고 건물의 정면과 측면의 출입구에 캐노피를 설치했다. 창문은 오르내리창을 설치하고 처마 끝에 물홈통을 달았다.

대각전 낙성식장 실내에는 만국기로 천정을 장식한 후 전면 불단에는 화초로 장엄하고 중앙에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인 '○(심불 일원상)'을 조그만 목판에 모셔 봉안했다.

대각전 현판은 송재호가 쓴 '大覺殿'을 정면에 걸고, '精神修養', '事理硏究', '作業取捨'를 출입구 측면에 걸었다.

원기20년 4월27일은 공동생일기념일로 전국에서 모인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3시경부터 대각전 준공식을 가지고, 저녁에는 남자 청년단 주최의 여흥회가 열려 11시경에야 마무리됐다. 이튿날에는 제7회 정기총대회를 가졌다.

익산총부 대각전에 심불 일원상을 정식 봉안함으로써 소태산대종사가 깨달은 일원상이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확정 시행됐다.

이듬해 9월에 초량지부, 12월에 영산지부 대각전과 신흥지부, 원기22년 3월에 용신과 원평지부를 신축하면서 일제히 불단을 마련하고 일원상을 봉안했다. 그리하여 차례로 각 지부와 회원들의 가정에도 일원상을 봉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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