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병행과 인재양성의 산실

▲ 원기39년 공회당은 중앙선원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전무출신에 대한 갈등을 하며 청소년 담당교무와 상담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같이 이야기를 듣던 교무가 한마디 해준다.

"야 원광대 좋지! 예전에는 원광 대학을 멸치대학이라고 불렀다. 멸치가 생선이냐? 원광대가 대학이냐? 그러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명문 대학이 됐지"하면서 웃던 기억이 난다.

이듬해 전무출신지원서를 제출하고 총부에서 간사 근무를 하게 됐다. 그때 공회당이란 곳에서 아침에 좌선을 저녁에 염불을 하면서 이 건물의 역사와 유래를 들었다.

그러면서 이 건물이 대학이었다면 멸치대학이라 불렀을 만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웃어본 적이 있다. 그런 원광대학이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를 가진 대학으로 선정이 되기도 하고 영화촬영도 많이 된 곳이며 이제는 이름 있는 명문대학이 됐다.

이러한 공회당은 원기14년 임시 원의회를 통해서 양잠실 건축을 결정하면서 공사에 착공하게 됐다. 봄과 가을의 양잠기간에는 농업부에서 전용하는 것으로 하며 그 외의 기간에는 대중의 휴식 공간 내지 선방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건립을 했다. 소태산대종사가 친히 감독하여 지은 함석지붕 12칸짜리 건물로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다용도 건물로 초기에는 "성성 적적한 자성자리를 발견한다"라는 뜻을 담아 성적당으로 불렸다. 원기 20년 대각전이 건축되기 이전까지 모든 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뿐만아니라 다용도 건물로 쓰여졌는데 특히 남녀 학인들이 고추 작업을 할 때면 소태산대종사가 나와 "너희가 일만 한다 하면 지루하니까 소창을 한다 생각하게 축음기를 갖다 틀어놓고 춘향전에서 절개를, 심청전에서 효성을, 흥부전에서 우애를 배우라. 일 중에서 공부하는 것이 둘 아닌 길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 현재의 공회당은 종법사의 대중 접견과 각종 모임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한 선배교무는 초기 교단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면서 "선진들이 누에를 키울 때면 소태산대종사는 뽕을 줄때도 염불을 하면서 주어라. 그러면 나중에 저 누에들이 나중에 우리 교단에 와서 보은을 할 것이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나중에 확인을 해 봐라. 얼굴에 점이 많은 후진들이 올 것이다. 다 이 누에들이 나중에 우리 교단에 일하러 올 것이다" 라고 이야기 했다면서 지금도 교역자들 중에 점이 있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 생각이 난다"고 하며 웃던 선배교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에를 키우고 동·하선기에는 선을 진행할 다용도 건물로 건축된 공회당은 후일 하선의 사용기간과 양잠으로 사용되는 기간이 겹치게 되면서 다시 양잠실을 신축하게 됐다. 이때부터 공회당을 구룡헌(九龍軒) 대강당이라 부르기도 했다.

공회당이 신축되면서 종전에 본원실, 금강원, 구조실 등에서 행하여진 선이나 예회도 공회당에서 행해졌고 염불, 회화, 강연 등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경진년 동선 때는 소태산대종사가 게송을 발표한 장소이기도 하다.

원기31년에는 유일학림(唯一學林 원광대학교 전신)이 개원되면서 공회당을 사용하게 됐다. 정산종사는 개학식에서 "대종사께서 유일이라는 교명까지 정해 놓았으나 일제 통치의 어려운 시국 관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이제 조국 광복을 맞아 개학하게 된 것이다. 첫 입학생이 된 것은 진리의 축복이요, 교단사에 길이 빛날 일이니 큰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제생의세의 큰 역군이 되라"고 훈시했다.

유일학림 강의는 정산종사·이공주·이동진화·이완철·이운권이〈정전〉강의를, 서경보 스님이 선학(禪學)을, 송창허 선생이 영어·역사·한문·국어를 강의했다. 박장식이 학림장을, 박광전이 학감을 맡아 운영했다. 후일 원광대학교가 정식인가 되어 총부 옆으로 옮기자 남자숙소로 사용되던 중 원기39년 중앙선원이 개원될 때 이곳에서 시작하게 됐다.
▲ 교단 초기 선진들이 공회당에서 선을 마친 후 대종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그후 원기48년 중앙선원이 발전적으로 해체된 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남기숙사로 사용됐다. 원기57년 반백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물 서쪽 일부가 헐리게 돼. 12칸의 함석집에서 7칸의 집으로 축소됐다.

원기63년부터 총부 선 도량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상주선원을 개설함으로 인해 '중앙선원'이라 불리던 건물이 '상주선원'으로 개칭됐다. 상주선원은 중앙훈련원과 별도로 재가 교도들에게 교리훈련을 시키는 훈련기관으로 상주선원 현판이 걸려 있고 상주선원 사무실(서쪽방)과 강의실(동쪽방)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편 두 개의 방은 상주선원 남자 선원객 숙소로 사용됐다.

필자의 경우도 총부에서 간사 근무를 하던 시절 공회당에서 아침에 좌선을 하고 저녁에 염불 했던 곳이다. 고등학교 바로 졸업하고 와서 처음 좌선을 배울 때 지도교무는 "항상 눈을 뜨고 하라"고 주의를 주곤 하였는데 한번은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는지 지도교무가 계속 눈을 뜨라고 주의를 준다.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금 선을 하는데 "왜 눈을 안뜨냐"고 주의를 주는 것이다. 허리를 바짝 세우고 이마에 주름이 지도록 눈을 치켜뜨고 나서야 지도교무의 지적은 멈추었다.

좌선을 마치고 청소시간에 옆에 있던 선배 간사교우에게 살며시 "나 선할 때 졸았냐"고 묻자 "네 눈이 작은 것을 탓하라"고 하면서 웃는다. 내 눈이 워낙 작고 이제 막 좌선을 배우면서 아직 눈이 부은 것이 덜 가라앉아서 지도교무가 보기에는 눈을 감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주면서 숙소에서 나올 때 조금 일찍 나와서 잠을 더 깨고 들어오면 좌선하는데 수마를 쉽게 조복 받을 것이라고 다독여주었다. 늘 정진하고 적공하며 모두에게 보살과 같았던 그 선배는 작년에 병고로 열반의 길을 떠난 여타원 송은성 교무다. 이 원고를 작성하면서 그때 처음 좌선하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열반한 선배의 공부심과 자비심을 다시 한 번 그려보게 된다.

초기 교단의 선진부터 총부 간사들, 그리고 예비교무들이 공부를 해오던 공회당은 한때는 총부에서 전무출신 열반 시 호상소로 사용을 하기도 했으며 예비교무들의 염불, 좌선장소로, 때로는 모임공부의 장소로 사용됐다. 그리고 현재는 종법사의 대중 접견 장소로 활용이 되고 있다.

<원불교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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