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소태산대종사와 도산 안창호가 만났던 총부 청하원의 옛 모습.
도산 안창호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4년의 실형을 받았다. 대전감옥에서 복역 중 위장병으로 1935년 2월, 형기 20개월을 남기고 가출옥했다.

안창호는 바로 상경하여 삼각정(三角町)에 있는 여관에 투숙했다. 여관에는 연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일본 관헌은 안창호가 많은 사람을 접하는 것을 싫어하여 '불근신(不謹愼)'이라고 자주 경고했다.

그리하여 안창호는 평안남도로 갔으나 거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경찰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주재소로 호출하여 힐난했다.

안창호는 전국 각지 순회에 나섰다. 순회하던 중 1935(원기20)년 여름, 이리역에 내렸다. 안창호는 만경강을 사이에 두고 이리와 인접해 있는 김제군 백구면 유광리의 치문학교 설립자 전치문을 방문하고,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 김한규가 설립한 계문학교에 왔다.

안창호를 안내하던 동아일보 이리지국장 배헌은 민족지도자 안창호와 자기가 존경하는 도덕단체 지도자인 소태산대종사를 서로 만나게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안창호는 배헌의 권유로 사전에 예고 없이 불법연구회를 방문했다.

배헌은 동아일보에 '맑은 호숫가에 이상적 생활을 하고 있는 불법연구회'란 기사를 실어 불법연구회를 세상에 처음 소개한 기자이다. 안창호의 총부 방문에는 매일신보 지국장 이창태와 조선일보 기자 조기하, 중외일보 편집국장 김철중이 동행했고, 이리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미행했다.

소태산대종사를 시봉하던 김형오는 안창호 일행을 안내하여 신축한지 얼마 안 된 대각전으로 안내했다. 뒤이어 이공주의 집 청하원 응접실로 인도하여 안창호와 소태산대종사가 만났다.

매우 피곤하고 초췌해 보이는 안창호에게 소태산대종사는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는 인사말을 하고 "이름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많은 세월 풍찬노숙(風餐露宿)과 영어생활(囹圄生活)에 건강을 크게 잃지 않으셨는지요"라며 건강에 대하여 물었다.

안창호는 걱정하여 주어서 고맙다고 한 후 "생각보다 큰 시설 규모에 놀랐습니다"고 말하고, "나의 일은 판국이 좁고 솜씨가 또한 충분하지 못하여, 민족에게 큰 이익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나로 인하여 관헌들의 압박을 받는 동지까지 적지 않은데, 박 선생께서는 그 일의 판국이 넓고 운용하는 방편이 능란하시어,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이 많으면서도, 직접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박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합니다. 반항도 좋고 투쟁도 좋지만 참으로 민족대계(民族大計)는 박 선생 같은 정신운동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앞으로 민족의 정신 실력 향상에 힘쓸까 합니다"고 했다.

그리고 안창호는 "보시는 바와 같이 나는 내 발이지만 어디를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내 입이지만 누구에게 내 맘대로 말할 수도 없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 뜻을 따르는 동지들도 구속이 많습니다. 여기서도 박 선생과 내가 속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박 선생도 나 때문에 불편을 겪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얼굴이나 정답게 보고 갑니다"고 했다.
▲ 도산 안창호의 초상화.

안창호는 속에 있는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총부를 떠났다.

안창호가 가고 난 뒤, 이 보고를 받은 전북도경은 이리경찰서를 문책하며 "조선 민족의 지도자인 안창호가 감복을 하고 간 단체라면 그대로 두어서는 아니 된다. 불법연구회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재미교민단체가 하와이에서 간행한 극민보는 안창호가 총부를 방문하고 소태산대종사를 만났던 것을 상기하며 '도산선생의 탄사 본지특파원 성동호 씨 원불교 본부 현지답사 지상낙원은 건설되는가'라는 제목으로 1956년 6월20일자로 원불교에 대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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