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반백년기념관에'우리집 부처'를 형상화.
불법연구회는 원기9년 총부 건설을 준비하며 익산 송학리에서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논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총부를 건설하면서부터 총부의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개간한 땅에 원예와 양잠을 시작하고, 원기13년에 발족한 농업부창립단은 그동안 꾸준히 기금조성에 노력하여 오다가 같은 해 총부 앞 언덕(현 대각전 옆 비탈)과 연구실터(원광대학교 터)에는 복숭아 과수원을, 진안 만덕산과 익산 황등에는 밤밭을, 총부 옆 알봉에는 박 등을 심었다.

농업부는 한 때 총부를 중심으로 한 공업부와 만석들 출장 농사를 짓는 농무반을 분리하여 운영한 적도 있으나 급변하는 시세에 부응하여 원기19년 농업부를 개칭하여 산업부를 설립했다. 산업부는 농공상(農工商) 각 분야의 기관을 설치하여 무산자들의 공부비용 마련에 도움을 주는데 주력했다.

원기21년에는 연구실터에 산업부 가옥을 독립하여 건축하고 각종 묘목, 약초와 야채 재배, 돼지와 토끼 등을 사육하여 큰 성과를 보게 됐다.

이듬해에는 총 18칸의 양계장을 증축하여 거기서 생산된 계란을 멀리 만주까지 수출하는 등의 산업활동이 활발했다.
▲ 양잠실에서 양잠하는 모습(원기21년 6월12일 촬영).
원기20년을 전후하여 불법연구회의 산업활동이 활발하여 총부가 모범마을로 만들어지자 사회의 많은 주목과 기대를 받았다. 그리하여 소태산대종사를 농성(農聖)이라고까지 불렀고, 신문기자들이 찾아와 취재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원기20년 5월9일자 기사에 '농사의 개량 산업의 발전, 축산의 증식 등을 장려하여 회원의 생활을 안정케 하고 기타 청결의 보지(保持)와 사상의 선도, 자제(子弟)의 교육 등을 힘써 이상적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동(冬) 3개월 하(夏) 3개월에는 열심으로 작업의 여가를 이용하여 불이(佛理)를 연구한다는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2년여 후 다시 소태산대종사를 취재하여 원기22년 6월15일부터 '심전개발과 자력갱생'이란 제목으로 '씨는 익산에 본부를 설치한 15년간에 오로지 자립의 정신 하에 회원 즉 교도와 같이 투박한 토지를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고 산야를 개척하여 과수를 식재하며 양잠 양돈 등 축산에 전력하는 일방, 불교의 대중화에 전력하여 심지어 엿 장사까지 하여 근검저축한 것이 현재 이천여 만원의 회(會)의 재산을 조성한 일면 씨의 양손에는 옹이가 박혀서 농부 이상의 험상궂은 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씨를 종교인으로 대하는 것보다는 자력갱생 생활의 모범으로 볼 수 있다'고 4일간 연재했다.

〈조선일보〉에서는 원기22년 8월1일자에 '불교혁신 실천자 불법연구회 박중빈 씨'라는 제목으로 취재 보도했고, 〈중앙일보〉에서는 원기22년 9월11일부터 3일간 '불교혁신운동과 불법연구회의 장래'란 제목으로 취재 보도했다.

차츰 일반인들과 각 단체에 불법연구회의 산업활동이 알려지자 시찰이나 견학을 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종교단체의 시찰단 일행이 총부를 방문하여 총부를 돌아보고 조실에서 소태산대종사께 여쭈었다.

"귀교(貴敎)의 부처님은 어디에 봉안하셨습니까?"

소태산대종사가 말했다.

"우리 집 부처님은 방금 밖에 나가 있으니 보시려거든 조금 기다리시오."

시찰단 일행이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의아하게 여겼다. 조금 후 점심때가 되어 산업부원 일동이 들에서 일을 하다 농기구를 메고 총부로 돌아오고 있었다. 소태산대종사는 시찰단들에게 산업부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이 다 우리 집 부처입니다."

"뭐라구요! 저 일꾼들이 귀교의 부처님이라구요?"

시찰단 일행은 입을 딱 벌렸다. 무슨 뜻인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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