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어는 공부와 사업의 표준이요, 요령
대각으로 천명된 일원상 진리
목표와 방향을 표어로 집약하다

▲ 오선명 교무 / 경남교구 문산교당
소태산대종사의 대각으로 천명된 일원상의 진리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목표와 방향이 집약된 것이 '표어'입니다. 심오하고 광대하며, 평이하고 간명하여 어떠한 시대, 어떤 지역의 인심을 불구하고 남녀·노소·유무식이 다함께 산부처가 되어 낙원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공부와 사업의 표준이요, 요령입니다.

물질(物質)이 개벽(開闢)되니 정신(精神)을 개벽하자

개벽(開闢)이라는 말은 매우 강렬하고 급진적이며, 충격 그 자체의 역동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변화, 개선, 개혁의 의미와는 수위가 다른, 엄청난 뜻 '갈아서 뒤집어엎은 세계'입니다. 건축공사를 예로 든다면 리모델링, 수선(보수) 등의 규모가 아니라 완전히 무너뜨리고 부수어 신축하는 차원이 개벽입니다. 그만큼 개벽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새로운 도학문명을 갈구하고 예견하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기존의 낡은 의식과 관습 등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가치관의 대 전환을 가져와야 합니다. 과학문명은 상식과 경험,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여 현실적으로 대응하며, 도학문명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비현실적인 접근을 떠나 진리적이고 사실적인 종교의 체험과 합리적인 훈련(영성계발)을 통하여 체득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

이 표어는 소태산대종사께서 천명하신 개벽시대의 종교가 지향하는 진리적인 신앙생활을 가장 간명하고 절제된 언어로써 진리의 구경을 체득하여 사실적으로 실천하게 하는 표어입니다. 전통불교의 심오한 교의가 담긴 화엄(華嚴) 천태(天台)의 종지가 그대로 밝혀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 돌 하나, 하찮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으로 명명하여 일원상 진리의 절대 존귀성과 절대 권능을 부여하였습니다.

이 표어는 진리불공과 실지불공을 통하여 일원상 진리의 위력을 얻고 그 체성에 계합하는 것이 종극의 목적입니다. 형식불공이나 종교의 미신적인 측면을 보다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새 시대, 새 종교의 신앙 행위가 드러나 있습니다.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는 선. 〈정전〉 무시선법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 내용입니다. 곧 일원대도의 원융무애한 수행은 시간과 장소에 걸림 없고, 재가와 출가의 구분이 없으며, 일이 있든 없든 누구나 정진 적공하여 대도에 들 수 있는 선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 병든 선, 무정물의 선, 무용한 병신을 만드는 선이라고 소태산대종사께서는 경계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선은 일부 특정인이, 특정 장소에서, 특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녀·노소·유무식이 수행도량이든, 일상생활에서든, 일터이든, 무애자재로 일원대도에 들 수 있는 최상의 수행법입니다.

과거 불교의 선이나 또는 도가의 수련법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되고, 특정인에 한정된 측면이 없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경향을 극복한 수행의 표어가 무시선 무처선입니다. 선은 마음(일심 一心)과 기운(氣, 호흡)을 운용하여 대각성불의 문에 들어가는 수행법입니다. 특히 원불교의 단전주 선법은 유불도의 최상 수련법이 지극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만 형식 수행에 빠지지 말고 참다운 수행으로 적공해야만 시시처처가 선이요, 법도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정일여(動靜一如) 영육쌍전(靈肉雙全)

일원상의 진리는 변·불변이 순환 무궁하고, 동과 정의 간격이 없습니다. 순환 무궁 하는 우주의 대기(大機)가 자동적으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정신과 육신은 불가분의 관계로 혼연일체임과 동시에 엄연히 각각의 기능과 역할이 분명합니다. 곧 하나이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영과 육은 주종과 선후의 관계가 아니며, 본말의 존귀성이 차별되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과 육은 함께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입니다. 쌍전(雙全)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정신이나 육신 그 하나에 편중하여 수행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소태산대종사께서 과거의 수행법이나 현재 혹은 미래의 수행법에 대하여 경계의 뜻이 담긴 원만한 수행법의 강령입니다.

동과 정, 정신과 육신을 차등하여 삼대력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동과 정, 정신과 육신의 상황성을 고려하여 선후의 차별은 분명히 구분하여 상보적인 방법으로 요령 있는 삼대력을 갖추는데 힘써야 합니다.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생활시불법(生活是佛法)

불법이 생활이요, 생활이 불법입니다. 대종사께서 밝히시기를 "…불법을 활용하여 생활의 향상을 도모할지언정 불법에 사로잡힌 바 되어 일생을 헛되이 지내지 말라"하셨습니다. 또한 "불법은 원래 세상을 건지는 큰 도"라 하셨습니다. 불법은 천하의 대도인 까닭에 어떠한 인연이나, 순역고락의 경계 일지라도 상생과 진급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불법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편벽된 수행을 닦아 자신과 세상에 아무런 제중의 실적이 없는 경우, 혹은 불법을 빙자하여 세상의 부귀향락을 누리는 경우, 혹은 불법을 오도하여 세상에 온갖 폐해를 남기는 경우는 모두 대종사께서 경계하신 점입니다.

불법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혜·복(慧福) 두 길을 인도하는 무상의 대도입니다. 곧 세상 만물 모두가 산부처님이요, 법도량이며,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산부처님입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 "상상하지 못할 이상의 불국토는"바로 이 순간, 이곳에서 우리 모두에 의해 건설되고 있습니다.

교리는 표어 정신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원불교 교리는 시·공간을 총괄하여 물샐틈 없이 짜여져 있습니다. 표어는 마치 천리마에 채찍을 가하듯 최종 귀결점은 일원상 진리에 뿌리하되 사통오달로 원융무애하게 진리와 교리에 생명성을 부여하여 요령의 묘책을 밝혀 주셨습니다. 특히 이 표어들이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보적인 관계성을 가지기에 원불교의 정체성 내지 교리를 해석함에 있어서 준거의 틀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표어만으로 교리해석의 접근은 옳지 않으며, 이 모든 표어의 정신을 충족시키는 교리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영겁의 법연동지님들 새 부처님 소태산대종사님의 일원대도 만났으니 성불제중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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