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성 교도·영산선학대학교( 논 설 위 원 )
문자(글, grapheme)와 언어(말, language)는 구별되어야 할 개념이다, 문자란 본래 언어를 담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대종경선외록〉 4장 5절에서 소태산 여래께서는 한문만 숭상하는 김성섭 선진에게 '도덕은 문자 여하에 매인 것이 아니다'라고 경계해 주셨다.

그러나 어디 한문에만 국한되랴? 한문에 묶이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글이란 문자에도 묶이면 안 되는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덕은 언어에도 묶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묶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어와 문자를 버려야 하는 것일까?

소태산 여래, 정산 여래, 대산 여래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 가르침을 받들어 열심히 마음 공부하는 원불교인이라면 무엇에 묶이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 아마 한 분도 없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산 속에서 화두 들고 벽만 쳐다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반야심경에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분명히 밝히셨는데 이 세상에 버릴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소태산 여래께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하셨지, 물질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질을 버려야 한다고는 안 하셨던 것이다.

〈대종경〉 성리품 13장을 연마해 보면 이 뜻이 더욱 드러난다. 소태산 여래께서 '도는 가르쳐 주어도, 도에 어긋나고, 가르쳐 주지도 아니하여도 도에는 어긋나는 것이다'라는 옛말의 뜻이 무엇인지 대중에게 물으신 후 답이 없자, 때마침 눈이 가득 내린 뜰에 나가 친히 도량의 눈을 치시며, '나의 지금 눈을 치는 것은 눈만 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대들에게 현묘한 자리를 가르침이었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눈이 내리는 현상에 한 눈을 팔면 소태산 여래께서 깨우쳐 주시려는 그 현묘한 자리에 절대 다가가지 못하게 된다.

상황을 바꾸어서 법문을 하실 그때 만약 눈이 아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소태산 여래께서는 무엇으로 현묘한 자리를 보이셨을까?

사실, 우리의 마음공부는 머물러야 할 그 자리에 꼭 머무르도록 하는 공부이고, 알아야 할 그 자리에서 꼭 알도록 하는 공부이며, 행동해야 할 그 자리에서 꼭 행동하는 공부다.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의 그 자리는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현묘한 자리인 것이다.

대산 여래께서 마음공부는 대각여래위를 표준으로 공부하라고 하셨다.

〈대산종사 법문3〉 (제5편 44장 참고) 따라서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그 자리가 우리 공부의 표준이다. 물질이 나쁘다고 버리는 것은 우리의 공부법이 아니다.

물질의 본래 성질대로 사용하되, 사용할 때 착(着)이 없고, 사용하지 않을 때도 절도(節度)에 맞으면 그것이 물질을 현묘한 자리에서 도 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한글은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대단히 과학적인 문자다. 그렇다고 한글이 만능은 아니다. 한글로 적어 놓으면 그 음가와 운용 원리에 따라 앵무새처럼 소리를 낼 수는 있으나 앵무새가 소리를 낸다고 해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글을 읽고 소리만 낸다고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한글은 영어의 알파벳 문자와 다르게 1자 1음소(音素)를 나타내는 음성부호의 특성을 지녔다.

영어를 국제음성부호(IPA, 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로 표기하면 소리는 같지만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들로 인해 문해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영어는 /ou/음을 표기하기 위해 -au-, -ou-, -ought, 등의 알파벳 연쇄를 사용해 변별이 비교적 쉬운데 반해 한글은 달랑 '오우'로만 표기하므로 많은 동음이의어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언어와 문자에 묶이지 않는 생활은 언어와 문자의 개별 특성을 잘 알아 반드시 써야할 그 자리에 꼭 사용하는 것이다.

소태산 여래께서 우리 교단의 초기 교서에 한자와 한글을 병기하신 것은 문자생활의 한 방향을 보여준다 하겠다.

일상적인 글은 한글로만 적어도 상관없으나 심오한 개념을 요구하는 어휘에는 반드시 한자를 병기하는 것이 한글과 한자에 묶이지 않는 문자사용 태도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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