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갈등 시작은 문화차이

요즘 위기 가정, 위기 청소년이 증가하고 있다.

깨달음의 달 4월 '가정을 위해 오신 대종사님'이란 주제에 맞춰 본사에서는 '우리가족이 달라졌어요'기획을 마련했다. 1주 남편이 달라진 사례, 2주 부모님 모시기 사례, 3주 이혼극복 가정, 4주 다문화와 결손 가정 사례를 알아보고 해결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 소 여물을 주고 있는 소계수 교도 가족.
소계수(49), 김혜옥(39·중국동포) 부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즐거웠다. 4월이라 길가에 개나리와 벚꽃들도 나를 반기는 듯하다. 춘향골 남원을 지나니 영호남 관문이라고 불리는 여원재가 나왔다. 남원에서 운봉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아흔아홉 굽이 여원재라는 말이 실감난다. 해발 477m 정상을 지나니 넓은 운봉평야가 펼쳐졌다. 지리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운봉평야는 어머니 품처럼 푸근했다.

운봉에 도착하니 소 교도가 반갑게 맞았다. 그의 안내에 따라 집에 들어서니 벽에 모셔진 일원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원상 옆에 '우리집은 서로를 귀히 여기고 언제나 정성 다하여 은혜와 진실 나누는 아늑한 쉼터 이어라'라고 새겨진 목판 족자가 정겹다. 결혼사진과 가족사진도 보인다. 말하지 않아도 행복한 가정임이 느껴진다.

중국 흑룡강성에서 지나가던 할아버지의 소개로 우연히 만나 부부연을 맺은 소계수 김혜옥 부부. 이들이 결혼한지도 16년이란 세월이 흘러 슬하에 1남 3녀를 둔 가정을 이뤘다. 현재 소 교도는 논농사와 가축을 키우고 아내 김 교도는 운봉 경효의집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다. 다문화가정이란 말이 나오기 전에 결혼한 이들 부부에게는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다가 만난 부부임은 확실하다.

믿음과 배려

이들 부부는 다른 다문화가정과 달리 부부 소통에 가장 큰 장애의 하나인 언어의 장벽은 별로 없었지만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로 생기는 부부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어려울 때마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배려로 이겨나갔다.

소 교도는 "그때만 해도 한국 남성들은 가부장적인 것을 많이 중시하며 살았다. 여자들은 집안 살림을 하고 남편을 모신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그런 것을 바라고 요구했는데 서로가 힘들어졌다"며 "나중에 남녀평등문화가 강한 중국에서 부모를 떠나 이국 타향에 생활하는 아내를 생각하니 아내가 이해가 됐다"고 말했다.

그 후부터 소 교도는 아내를 많이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러한 소 교도의 노력이 있었기에 김 교도는 한국문화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김 교도는 다문화가정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한국의 음식, 풍습 등 여러 가지 문화를 배우고 익혔다. 이제는 동네에서 부녀회장으로 활발히 사회활동까지 하고 있다.

김 교도는 "처음 결혼해서 한국에 왔을 때 남편이 저를 많이 믿어줬다. 몇천 만원짜리 생활비통장을 맡기면서 관리하라고 했다"며 "만약에 처음부터 믿지 못하고 생활비를 타 쓰고 하는 각박한 생활을 했다면 아마 숨막혀서 같이 살지 못했을 것이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는 "제가 처음 운봉에 왔을 때만 해도 운봉에는 조선족 동포가 6명 정도 시집왔었다"며 "그런데 지금은 다 가고 나 혼자 남게 됐다"고 안타까워 했다.

한국에 시집온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있어서 경제문제는 매우 민감하면서도 중요하다. 대부분 결혼이주여성들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한국인과 결혼한다. 때문에 경제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가 다문화가정의 화목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면 다문화가정의 결혼생활은 보장하기 어렵다. 잘 살 것 같았던 중국동포 여성들이 떠나버린 이유도 경제적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앙으로 순숙

믿음과 배려로 다져진 이들 가정은 신앙으로 더 순숙돼 갔다. 서울에서 살다가 한국에 불어닥친 IMF경제위기로 생활이 어려워 지자 2000년도에 고향으로 귀농을 했다. 그때부터 김 교도는 남편을 따라 차츰 운봉교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남편을 만나 처음으로 원불교를 알게 됐다"며 "교무님들이 하시는 설교가 우리 생활 속의 이야기를 해 주는 것 같아 처음부터 별 거부감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천도재와 열반기념제 때 부르는 성가가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며 "어렵고 힘들 때면 성가를 마음 속으로 부르며 이겨냈다"고 털어놨다. 그의 어렵고 힘들었던 시골 생활이 짐작이 갔다.

요즘은 좋은 법문이 있으면 스마트폰에 저장해 시간 날 때마다 읽어 본다는 그는 "법문을 통해 내면을 많이 되돌아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며 쑥스러워했다. 옆에 있던 소 교도가 "예전에는 아내가 고집스럽고 마음에 여유가 없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많이 여유로워져 남의 세정도 곧잘 살펴주고 하는 것 같다"고 김 교도를 거들었다.

소 교도는 "원불교를 다니지 않고 사회생활만 하고 살았다면 살면서 화난 마음을 억제하는 힘이 약했을지도 모른다"며 "그러면 지금처럼 이렇게 원만하게 살지 못했을 것이다"고 고백했다. 젊은 시절부터 몸에 배인 원불교 신앙이 화목한 가정을 가꿔가는데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취재를 마치고 나니 벽에 걸린 '장락무극(長樂無極, 즐거움이 끝이 없다)' 족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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