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묘 쓰지 말고 나무 한그루라도 더 심으라"

▲ 민 박사는 세계가 알아주는 3대 수종(목련, 호랑가시나무, 동백)을 천리포수목원에 가꿨다.
나무 사랑으로 유명한 천리포수목원의 민병갈 설립자를 추모하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8일 수목원 설립자 민병갈 박사(이하 민 박사)의 10주기를 맞아 수목장을 거행한 것이다. 그의 생전 소망처럼 '나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거름'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는 "나의 마지막 소망은 내가 죽은 후에도 자식처럼 키운 나무들이 아무 탈 없이 잘 자라는 것이다"며 생을 마칠 때에도 나무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천리포수목원은 충남 태안에 만리포해수욕장과 인접해 있다. 진태구 태안군수는 10주기 행사장에서 민 박사를 추모하며 "이 자리에 수목원이 없었다면 볼품없는 시골 땅에 불과했을 것이다"며 "이제 세계인이 수목원을 사랑한다. 최고의 수목원이 되도록 하겠다"고 개발의지를 밝혔다.

수목원의 임준수 감사도 고인의 약력 소개에 앞서 "민 박사는 생전에 2가지 소망을 가졌다"며 "첫째는 자연인으로 사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인으로 사는 것이다"고 소개했다. 임 감사는 민 박사의 10주기에 맞춰 〈나무야 미안해〉라는 책을 발간했다. 민 박사의 자연사랑을 그대로 옮겨 놓은 셈이다.

10주기 추모행사에서 민 박사의 수양 딸 안선주 교무를 비롯 태안·홍성·예산교당 교무와 교도들이 함께해 독경을 거행했다.
▲ 민 박사의 수목장에 함께한 교무들이 헌화를 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민 박사, 투병과 열반

2001년은 민 박사가 81세 생일을 맞는 해이다. 수목원 직원들은 12월24일 마을 주민들을 초청해 민 박사의 팔순연을 성대하게 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2002년 1월6일 민 박사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직장암 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초인적인 투병 끝에 4월8일 태안 보건의료원에서 82세의 일기로 열반했다.

사후 공개된 민 박사의 유언장은 간결했다. "나의 전 재산을 천리포 수목원에 유증한다." 이 한마디 뿐…. 이 유언은 '그의 전 재산을 나무들에게 준다'는 말과도 같다. 평생토록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에게 미안했던 그는 전 재산과 함께 자신의 몸까지 나무에게 바쳤다.

민 박사는 자신의 장례문제에 관해서는 유언장에 밝히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 매장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임준수 감사는 1990년 자신과 대화 시 민 박사와의 일화를 밝혔다.

"민 박사는 시신이 나무의 생장을 돕는 거름으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또 "죽으면 한국에 묻힐거냐"는 임 감사의 질문에 "나는 나무를 심기 위해 수목원 경내에 있는 수많은 묘지를 파헤쳤다"고 고백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매장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즉 화장을 해서 나무뿌리 근처에 뿌려지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전했다. 그러나 그가 열반 후 장례는 민 박사의 뜻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양아들의 희망에 따라 수목원 경내에 매장했다.
▲ 유족들이 민 박사 나무 아래 수목장을 진행했다.


수목장 실천과 유훈

2011년 말, 천리포수목원 재단 이사회는 민 박사의 10주기 추모행사를 기획하면서 고인의 유지를 실천하기로 했다. 이제 그의 시신을 거둬 '수목장을 치르기로 한 것'이다. 수목원 경내에 묻혀 10년 세월을 보낸 민 박사가 생전에 그토록 사랑했던 나무들 곁에서 사시사철을 보내게 하자는 배려이기도 하다.

변우혁 (사)수목장실천회 이사장은 "아직 한국사회에서 수목장이 일반화 되지 않아 유해를 모시는 함을 어떤 것으로 해야할 지 고민이 많았었다"며 "이번 민 박사의 수목장에서는 전주한지공예 장인으로부터 지통을 주문 제작 받았다. 나무가 원재료인 종이를 이용해 유해를 모시면 그 뜻이 고스란히 전해질 것 같다"고 소개했다.

수목장은 먼저 추모독경을 한 후, 추모의 노래, 유족대표 인사, 수목장 이장식, 헌화 순으로 진행됐다.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둔 2m 정도의 둥근 구덩이에 꽃잎을 뿌려 고인의 넋을 달랬다.

그리고 지통에 넣은 유해를 모셨다. 다시 꽃잎을 조금 뿌린 후 흙으로 유해를 덮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헌화했다.

생전 민 박사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무 사랑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산에서 잘 자라는 나무를 캐다가 자기 집 정원에 심는 것은 잘못된 나무 사랑이다. 자연은 생산자요 인간은 파괴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 일화를 듣는 순간 소태산대종사와 제자의 '남중리 소나무' 법문이 떠올랐다. '시방일가(十方一家) 사생일신(四生一身)의 주인'으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한 것이다.

민 박사가 평소 했던 말은 "죽으면 개구리가 되어 수목원의 이 곳 저 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10주기 추모행사에서 안선주 교무가 '추모의 노래'를 부를 때 인근의 연못에서도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합창을 했다.

죽음을 앞 둔 민 박사는 2002년 3월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을 점심에 초대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뒤 작은 선물꾸러미를 건넸다. 바로 석고로 만든 작은 개구리였다. '죽어서 개구리가 되고 싶다'는 것은 자연의 일부로 남겠다는 것이다. 또 숲에서 자연과 어울려 살고 싶다는 의지를 전달한 것이다.

임 감사는 이 개구리에 대해 "책을 쓰는 동안 변함없이 내 곁을 지킨 보초는 민 박사가 세상 떠나기 2주 전 정표로 준 개구리 석고상이다. 억새 줄기로 엮어진 바구니 속에서 초록색 얼굴을 빼꼼이 내민 이 개구리는 지난 3년간 자신을 사랑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제대로 쓰는 지 감시한 셈이다"며 "책상 옆 벽에 걸린 그 개구리가 눈에 띌 때마다 나는 민 박사가 생전에 소망했던 개구리로 다시 태어나 어느 아름다운 호반에서 한가로이 유영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고 추모했다.

각종 목련이 화려하게 핀 28일에는 수목원에서 후원인의 날을 개최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리포수목원'이란 타이틀, 이 역시도 민 박사의 나무 사랑을 고스란히 말해 주는 봄이다.
▲ 수목원 내 민병갈 박사의 흉상.
민병갈(1921~2002·미국, 칼 페리스 밀러) 박사는 1921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태어났다.

1945년 9월 미군 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한국 문화와 자연에 심취하여 1962년부터 천리포 지역의 황폐한 땅에 나무를 심고 키웠다. 그 결과 천리포수목원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키워냈다. 1979년 귀화해 33개국 315개 기관과 교류를 맺고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인 완도호랑가시나무를 학계에 보고하는 등 우리 식물을 세계에 알렸다. 그가 세운 천리포수목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수목원이다. 현재 이 수목원에는 우리나라 및 세계 여러 나라의 식물 1만4379 품종이 자리 잡고 있다.

2000년에는 원광대학교에서 명예 농학박사 학위 수여와 원불교에 입교해 임산(林山)이라는 법호를 수증했다.
암 투병 중에도 해외 출장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2002년 3월에는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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