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유일학림 제1기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정산종법사.
불법연구회에서는 원기14년에 유아양생소, 유치원, 학교, 양로원, 병원 등 5개 기관 설립을 계획했다.
그 후 원기17년 7월에는 총부와 영산지부 청소년 학인들을 전담 지도하는 '학원 교무'직을 신설하여 이완철을 첫 학원 교무로 임명하여 청소년을 지도하게 했다.

원기20년 여름, 총부에 '수도학원(修道學院)'이라는 야학원을 설치하고 회중의 청소년 학원에게만 실시해 오던 교육을 비회원인 근동의 남녀 아동들까지 확대하여 그 인원이 150명에 달하여 1급 2급으로 나누어 운영했다.

원기22년에는 장차 학원 운영 전문인 양성 방안의 일환으로 박광전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 원기24년 동양대학 3학년 재학 중에 '불법연구회 학원장'이란 사령장을 주어 임명했다. 이는 학교를 세워 젊은 인재를 길러내려는 의지였다. 박광전이 원기25년 전문학교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졸업 후 귀국하여 학원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학원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게 됐다.

전라남북도 일원에는 불법연구회에서 전문학원을 설립한다는 소문에 익산은 물론 영광, 정읍, 김제, 진안 등지에서 청소년들이 익산총부로 모여들었다.

원기25년에는 종전 총부교감 직을 선원교감과 학원교감으로 업무를 분리하고 학원교감에 송도성을 임명하여 학원교육을 강화했다.

원기26년1월 사설학원인 불교전수학원 설립신청서를 전라북도경에 제출하게 했다. 원기26년 4월 정기총회를 기하여 경성법전 출신 박장식과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 출신 박광전을 학원 교무로 발령을 냈다.

비록 당국으로부터 사설학원 설립인가를 받지 못했지만, 상주하는 교무들을 교사진으로 편성하여 계속 청소년들을 교육시켜 나갔다.

일제 강점기의 총부 경제 사정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어서 이때 학원들은 각자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남학원생들은 산업부나 보화당이나 총부 각 부서에 근무하여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으나 여학원생들은 수용할 만한 기관이나 회관(교당)이 부족하여 이리 천일고무공장이나 택전제사공장, 전주제사공장, 또는 광주에 있는 제사공장까지 나가 학비를 마련했다.

이들은 오직 배우고 싶은 소망 하나로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공장에 다녔다. 당시 학원생들은 남녀 합쳐 30여 명 남짓 되었고 공회당의 큰 방 네 칸을 교실로 사용했다.

공부과목은 경전, 불교학, 국사, 한문, 국어(일어), 습자, 일기 등이었다. 경전과 불교학, 습자는 송도성이 가르쳤다. 경전은 '근행법'을 가지고 강의하거나 외우게 했고, 소태산대종사의 법설을 기록한 것을 교재로 강의했다.

습자는 수시로 선생에게 와서 체 받고 익히게 하였고, 한문은 유서를 가르쳤다. 국사는 류허일이 가르쳤고, 일어는 박제봉이 일역(日譯)한 〈요람〉을 가지고 가르쳤다. 일기는 매일의 유무념 대조와 감각감상, 심신작용처리건을 기록해 제출하여 감정을 받게 했다.

불교전수학원 설립 신청서를 제출한지 1년이 지나도록 허가에 대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소태산대종사는 개정 회규를 시행하고 또 다시 사설학원이 아닌 정식학교 불교전수학원 설립을 추진했다. 개정 회규에는 강원, 선원규정을 삽입하도록 하고, 중등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박광전을 교무부장에 선임하고, 학원교무엔 박창기를 임명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이 일을 추진하며 당시 회중의 큰 수입기관인 건재약방 보화당을 처분해서라도 정식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교무부장 박광전은 일인(日人)으로 대학동문인 이리여학교 교장인 석택(石澤)을 앞세워 도경과 접촉토록 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소태산대종사는 끝내 정식 교육기관 설립을 실현하지 못했다. 소태산대종사가 열반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정산종법사는 소태산대종사의 뜻을 이어 유일학림을 설립하고 전문부와 중등부의 편제로 발족했다.

그 후 전문부는 원광대학교로 중등부는 원광중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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