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소태산대종사에게 선물받은 행복이 상복이 된 제자들.
소태산대종사는 열반 한두 해 전부터 대중들에게 혹은 개인에게 간절하게 여섯 가지를 부촉했다. 또한 교단의 장래에 관계되는 부촉을 많이 내려 주는 가운데 열 가지를 자주 말했다.(〈대종경선외록〉 참조)
소태산대종사는 열반하기 몇 해 전부터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 내가 보따리를 싸 가지고 털털 털고 떠난다면 몇명이나 나를 따라 올랑가?"

일제의 압제는 갈수록 가중됐다. 경찰 조사가 너무 심할 때에 소태산대종사는 대중을 거느리기에 정신을 많이 써 상기(上氣)가 될 때면 말했다.

"내가 수(壽)를 얼마 못할 것 같다."

소태산대종사는 일제 탄압이 얼마 가지 못할 것임을 예언했다. 원기27년, 그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정산 송규가 소태산대종사께 여쭈었다.

"저 사람들의 극성이 얼마나 가오리까?"
"먹구름이 두텁게 낀다고 해서 떠오르는 해를 어찌할 것이냐!"

며칠 후 정산 송규가 다시 종법실을 찾았을 때 정산 송규를 후원으로 불러 말했다.

"일인 형사 한 사람이 나에게 귀띔해 주기를 경무국에서 나를 '조선의 간디'라고 지목하면서 더 크기 전에 불법연구회를 조처해야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더란다. 독이 올라 나를 본다고 하니 내가 멀리 가야겠다."

소태산대종사는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 환장하는 무리가 더러 있을 터인데 그 목을 넘기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큰일은 없을 것이다."

소태산대종사는 정산 송규에게 당부했다.

"너는 왜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네 역량을 내어서 하는 일이 없느냐? 이제 네 의견도 내세워보고 역량을 내서 대중을 거느려 보라."

어느 때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면 송규를 의지하고 살아라"하고, 원기27년 겨울 교무선 중에는 소태산대종사가 자신이 쓰는 법상보다 약간 작은 법상을 만들어 오게 한 다음 정산 송규를 그 법좌에 앉히어 설법하게도 했다.
▲ 소태산대종사의 영구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리읍내).
소태산대종사는 원기26년 1월에 대중에게 전법게송을 전하고, 원기27년 가을부터는 최후로 지방 순시를 강행하며 지방 교무들과 교도들에게 부탁할 일은 부탁했다. 원기28년 4월 총회 때, 조실로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소태산대종사는 일일이 작별의 말을 하며 한 마디씩 했다.

"깊은 산중에 수양 갈란다."

"금강산에 수도 갈란다."

"너거 집에 갈란다."

소태산대종사의 어쩐지 모르게 처연한 어조에 울지 않고 가는 제자가 없었다. 제자들은 소태산대종사가 열반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어디 멀리 가서 수양할 줄로 알았다. "너거 집에 갈란다"는 말에 지방 제자들은 회관(교당)에 새로 상을 마련하고 진짓상에 올릴 그릇과 수저를 장만해 놓고 스승님 오실 날만 고대했다.

총회가 끝나고 소태산대종사는 각 지방 회원들에게 부탁할만한 말은 다 부탁하고, 5월에는 지도급에게 부촉할 일은 유감없이 부촉했다. 그러나 대중은 그 뜻을 짐작하지 못했다.

소태산대종사는 경성에 가서 다른 불교 종단의 법복 몇 벌을 구해 와서 '행복(行服)'을 만들었다. 법락은 조동종의 것을 많이 참조했다. 원기27년 총회부터 소태산대종사는 제자들에게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가져가 입으라며 행복이라는 검정 법복을 한 벌씩 지어주기 시작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열반을 한 달여 앞둔 원기28년 총회 무렵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세탁부에 올라와 법복 짓기를 독려했다. 5월에는 지도급에 있는 30~40명까지 새 법복을 지어 주면서 부촉할 일은 다 부촉하여 주었건마는 대중은 그 뜻을 짐작하지 못했다.

2년여에 걸쳐 제작된 200여벌의 이 검정 행복을 선물 받은 제자들은 모두 기뻐하며 소중히 간직했지만 이것이 스승의 열반시 장의행렬 상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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