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대산 김대거 종사는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에 이은 3대 종법사였습니다. 대산은 법랍 70년에 종법사 재위 33년이고, 퇴임 후 4년을 더 생존하여 세수 85세에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러한 이력은 종교인으로서 그가 원불교와 더불어 장수하였고, 또한 장기간 원불교 최고의 지위를 누리며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대산의 위상과 업적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만큼 확고합니다. 그렇다면 문학적으로 그의 위상과 업적은 어떠할까요? 한 마디로 대산의 문학적 위상과 업적은 정말 만만치가 않습니다.

1914년에 전북 진안에서 김해김씨 인오와 안경신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영호이지만 원불교와 인연을 맺은 후로는 법명 대거(大擧), 법호 대산(大山)으로 불립니다. 원기9년(1924), 소태산대종사 일행이 처음으로 선(禪,정기훈련)을 실시코자 진안(만덕산)에 오게 됩니다. 이때 신앙심 깊은 조모 노덕송옥의 안내를 받아 11세의 나이로 소태산을 만나 선에 동참하니 이것이 생애의 향방을 결정짓는 운명적 사건이었죠.

16세에 익산 총부에 가서 정식으로 출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아 교단내의 위계가 승승장구하여 40세에는 교단 최고의결기관인 수위단의 중앙위에 오릅니다.

아울러 교단행정의 수반인 교정원장이 되어 종법사에 버금가는 위치에 이르렀으나 이미 30세 무렵부터 감염된 폐결핵이 악화하여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생활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원평 등지로 다니며 치료한 덕분에 일단 건강을 회복한 듯하였으나 36세에 다시 발병하자 한쪽 폐를 절제한 상태로 전지 요양을 다니면서 엄청난 시련을 겪습니다. 이 투병이 대산의 종교적 수행이나 문학적 성숙에 막대한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으니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표기문자로 볼 때 대산문학은 한글문학과 한문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의 한글시가(詩歌) 태반은 출가 후 차세대 교단 지도자로 경륜을 쌓던 수행기(1929~1943)에 나왔고, 한문 작품은 투병기라 할 적공기(1944~1961)에 집중된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달리 말하면 법력이 향상되는 후기로 갈수록 그는 한문의 매력에 빠진 셈입니다.

작품의 태반은 대산종사법문집 제5권인 〈여래장〉(원불교출판사, 1995)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장르별로 보면 아래와 같이 분류됩니다.

시조: 〈피안의 님〉 〈사공〉 〈온종일 나린 비〉 〈구공산상봉에서〉 〈재방언의 노래〉
창가: 〈일여선가〉
선시: 〈입지시〉 등 50수 내외
비문: 정산종사성탑명
문장: 〈원상대의〉 〈정진문〉 〈채약송〉 〈일문일답〉 〈지유즉지강〉

창가와 시조로 분류한 작품 중엔 나누기가 쉽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선시는 일반적 한시와 게송류를 묶은 것으로, 정확히 편수를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성격의 많은 작품이 있답니다. 문장이라 한 것도 문학과 비문학의 구분이나 장르 구분이 애매한 한문(산문) 작품들을 묶어서 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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