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

▲ 박명은 교무 / 제주교구 제주교당
"이 세상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 가나니, 세상이 넓은 만큼 이치의 종류도 수가 없고, 인간이 많은 만큼 일의 종류도 한이 없나니라. 그러나 우리에게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이나 우리가 지어서 받는 고락은 각자의 육근(六根)을 운용하여 일을 짓는 결과이니, 이치의 대소 유무를 모르고 산다면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의 원인을 모를 것이며…."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당하면 거기에 끌리어 온전하고 참된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 하기 싫은 일을 당하면 거기에 끌리어 인생의 본분을 잃어 버려서 정당한 공도를 밟지 못하고 번민과 고통을 스스로 취하게 됩니다. 그 괴로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에게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이나 우리가 지어서 받는 고락은 각자의 육근을 운용하여 일을 짓는 결과라 하셨습니다.

육근을 운용하는 주인은 내 마음이며 내 마음의 본성은 일원상의 진리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똑같이 공급해 준 것이 '성품'이며 이 성품은 진리에 뿌리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뿌리한 성품은 우리에게 일체 생각, 앎, 감각, 감정, 정서, 의지 등 모든 분별심의 뿌리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리에 바탕하고 진리로부터 떠날 수 없는 관계임을 알게 됩니다.

경계를 따라 나타나는 마음도 내 마음이요, 경계 전의 청정한 성품도 내 마음입니다. 이 모든 마음이 일원상의 진리이며 내 자신이 본래 일원상입니다.

나의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그대로 일원상으로, 대소유무 이치를 따라 시비이해를 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이 마음을 그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 마음을 순경과 역경에 빼앗겨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생령들의 처절한 윤회의 삶의 모습입니다. 현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보는 눈은 그 마음이 현재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분별성과 주착심이라는 욕심의 구름에 가리어 있기 때문에 재색명리에 끌리고 탐심 진심 치심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분별성과 주착심이 바로 고통의 경계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에는 본래 분별과 주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욕과 탐욕에 젖어 삶을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분별성과 주착심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분별성과 주착심의 뿌리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나'라는 개체로 인하여 형성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지수화풍 사대로 모였다 흩어졌다 반복하는 육신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마음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허망한 '나'를 놓아버리고 참된 성품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거짓 '나'를 떨쳐내고 본래 분별과 주착이 없는 우리의 성품자리를 드러내는 것이 공부입니다. 한 마음을 밝혀 마음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은혜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성품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 해탈의 심경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번뇌의 마음이요 또 하나는 보리의 마음입니다. 번뇌는 탐진치 삼독과 상에 뿌리하여 나오는 마음이요, 보리는 불성에 뿌리하여 나오는 마음입니다. 번뇌의 마음은 삼악도 윤회로 몰고 가는 중생의 삶이요, 보리는 깨달음과 해탈로 인도하는 부처의 삶입니다. 그러나 "성품 밖에 법이 없고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고 한 말씀과 같이 법을 찾되 성품에서 찾아야 하고 부처를 구하되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성품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누구에게는 더 있고 누구에게는 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보살도 그 성품이고 중생도 그 성품이지만 불보살은 밝혀 빛낸 반면, 중생은 묵혀서 사장시켰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대종사께서는 "허공법계를 완전히 자기 소유로 이전 증명 낸 사람이 있느냐?" 물으시고 삼세의 모든 불보살들은 형상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허공법계를 다 자기 소유로 내는 데에 공을 들였으므로 형상 있는 천지만물도 자기 소유로 수용 한다" 하셨습니다.

삼세의 불보살들이 이전증명 낸 그 자리,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성품자리, 우주만유가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그 자리, 유정의 마음과 하나 되는 그 자리, 여래심을 자각하는 나를 만들어 가는 공부를 통해 마음의 본성을 회복하고 육도윤회에서 해탈을 얻어서 자유를 찾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해탈한다는 것은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일체존재가 분별 사량이 다 끊어진 입정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입정처를 깨닫는 것은 곧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너와 나의 분별이 허망한 것이며 집착 또한 허망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이 더 이상 분별과 집착의 상을 그려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알고 보면 밖에 있는 게 아니고 내안에 다 갖춰져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서 찾아 쓰느냐, 아니면 발견하지 못하고 쓰지 않느냐의 차이에 있으며, 본래 내 것이기 때문에 찾으면 됩니다. 찾아서 스스로 나를 믿어야 하고, 내 양심을 지켜가야 하고, 성불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는 자리에서 생과 멸이 있는 것이 성리자리이다. 성리에 토가 떨어져야 그 때부터 큰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성리에 바탕하여 공부하면 크고 맑고 바르고 밝다. 또 탐진치가 일어난다 하여도 바로 비추어 녹여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없고 없고 또한 없는 것도 없는 그 자리, 아니고 아니고 또한 아닌 것도 아닌 그 자리에서 천상천하에 독존하기를 심축해 봅니다.

"생함도 멸함도 없는 자리에서

생과 멸이 있는 것이 성리 자리

성리에 토가 떨어져야

큰 공부 시작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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