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정산 송규의 종법사 취임 기념.
▲ 대각전에서 정산 송규의 종법사 추대식.
소태산대종사가 원기28년 6월1일 열반하여 6월6일 발인을 하고 마동 수도산 이리 화장막에서 화장했다.

이튿날인 6월7일, 새벽에 송도성, 김형오, 정광훈, 서대원, 정세월 등이 성해(聖骸)를 수습하여 조실에 모시고 성해 봉안식을 했다. 이렇게 하여 소태산대종사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 됐다.

성해 봉안식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후계 종법사 선정에 관한 수위단원과 교단 중진회의가 있었다.

총무부장 박장식이 "일제는 종사주께서 열반하시면 서로 종권 다툼이 일어나서 우리 회상이 자멸하리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종사주 재세시 '내가 떠나면 송규를 의지하고 살아라'하신 말씀과 지난해 겨울 교무선 중에서 종사주께서 쓰시는 법상보다 약간 작은 법상을 만들어 오게 한 다음 정산 송규 중앙단원을 그 법좌에 앉히어 설법하게 한 일을 미루어 이를 유언으로 알고 받들어야 한다고 봅니다"는 등의 의견에 대해 모두가 찬동했다.

그리하여 정산 송규를 후계 종법사로 봉대할 것을 가결했다.

종법사 선정에 이러한 비상수단을 쓴 것은 당시 회규 제21조에는 '종법사는 법강항마위 이상의 정수위단을 피선자격으로 하여 본 지부연합회의에서 선정하고'라고 되어 있었고, 제98조에는 '본 지부연합회의에 출석할 직원의 자격은 본부의 종법사, 회무총장, 부장, 교감, 예감, 이사, 교무, 지부·출장소의 지부장, 주무, 교감, 교무'로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종법사 선정에 관한 내규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경험도 없는데다가 선거를 하게 되면 일제가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이간술책을 쓸 것이 자명하므로 수위단원과 중진간부들이 의견을 모은 것이다.

다음날 6월8일 오전 10시, 총부 대각전에서 경향 각지의 내빈과 재가출가 대중이 참예한 가운데 새 종법사 취임식이 있었다.

취임식에서 정산 송규 종법사는 소태산대종사의 영전에 취임 고백문을 올렸고, 불법연구회 회원 일동은 소태산대종사의 영전에 선서문을 올렸다.

이어 정산종법사는 종법사 취임 법설에서 "내가 오늘까지 이 자리에 오르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바가 없었다. 과거 불교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통 조사도 나고 도력이 드러난 조사도 나며 3천년을 내려오는데 불상을 모시고 내려왔다. 그러나 우리 회상은 대종사께서 내어 놓으신 법이 있고, 또 대종사의 법하에서 직접 훈련받은 많은 동지가 있으니, 대종사의 법을 전하기로 온갖 정성을 다한다면 대체에 어긋나지는 아니하리라는 마음에서 용기를 갖고 이 자리에 임하게 되었다"고 했다.

불법연구회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새 종법사를 중심으로 회무를 계승하여 소태산대종사 생존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발전해 갔다.

원기30(1945)년 8월, 나라가 광복이 되자 소태산대종사의 평소 유명도 있었고, 또 광복 이후 교세의 발전으로 보아 '회(會)'의 명칭을 '교(敎)'로 개정하자는 주장들이 나왔다. 그리하여 교명을 여러 안 중에 정산종법사가 낸 '원불교(圓佛敎)'라는 안이 원기31년에 결정되고, 이듬해 4월 총회에서 '원불교'로 확정됐다.

교헌을 새로 기초하여 문교부에 '재단법인 원불교' 설립허가를 신청했다. 문교부로부터 설립허가가 약 4개월 후 원기33년 1월에'재단법인 원불교(이사장 류허일)'의 등록 인가가 나왔다.

교헌이 수정되었고, 동년 4월26일 총대회에서 〈원불교교헌〉이 정식 통과됐다. 또한 새 교헌에 의한 제1회 중앙교의회는 종법사와 수위단원은 제1대 기념총회 연도인 원기38년 4월까지 유임하기로 했다.

원불교 교헌이 통과된 이튿날(27일), 총부 대각전에서 교명 선포식을 가지고 새 회상을 '원불교(圓佛敎)'라는 정식 교명으로 천하에 공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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